모래로부터 먼지로부터 [장석원]
천원 한 장을 구걸하는 남자
떠오른 돌멩이 같은 비둘기들
처음 와본 것 같다
어떤 명령에 의해 걸음을 멈추었을까
뒤를 돌아본다 움푹 패어 있다
한 움큼 뽑혀나간 듯하다
광장은 쪼개지는 곳
바람이 그러하듯
광장은 중심을 지나지 않는다
바람과 햇빛, 습도와 명암까지 똑같다
지루하고 무한한 한 번의 삶이었지만
걸인이기도 하고 한 그루 나무이기도 하고
첨탑에 걸린 구름이기도 하지만
지워진 얼굴로 여기까지 걸어왔지만
횡단하는 비둘기로 가득 찬 하늘 밑에서
잠을 생각한다, 사랑의 복습을 꿈꾼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또한 아무것이기도 했다
서울역 광장의 남측면에 자리잡은 매점 앞
여섯시의 저무는 태양 아래
나는 가만히 서 있다
라디오에서 시보가 흘러나온다
라디오는 모든 것을 삼킨다
배스킨 라빈스, 일요신문, 비보이, 달라이라마, KTX, 해양수산부, 아메리카 인디언, 결혼반지, 모더니즘, 야전교범, 북악터널, 아도르노, 우리은행, 하이힐, 가창오리, 동호대교, 불심검문, 사발면, 개인택시, 콘돔, 멕시코만류, 리더스 다이제스트, 콩코스, 옥수수, 무디 블루스, 서정주, 채털리부인, 청약통장, 롯데리아, 문화상품권, 수유리, 벡스, 갤러리아, 코닥필름, 화계사, 동아운수, 잉여가치, 넥타이, 야간순찰, 라이터, 고르끼, 남대문, 글러브, 안기부, 비정규직 철폐, 유모차, 스타벅스, 막스 베버, 프리즘, 민노총, 반시대적 고찰……
그리고 어느 금요일 저녁의 거리를 걸어갈 사람들
코스닥지수가 흘러나오는 시간이다
밤의 날씨와 모 베터 블루스가 이어진다
비는 반드시 내리리라
- 창작과비평 132호
노래의 자연 [정현종]
-미당 서정주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시를 기리는 노래
향가 이후
이런 무의식의 즙이 오른 언어가 어디 있었느냐.
땅이 꽃을 피워내듯이
나무에 물오르고 뻐꾸기가 울듯이
시의 제일 높은 자리
노래의 자연을 만판 피워냈느니.
활자들이 모두 주천(酒泉)이기나 한 듯
거기서 술이 뽈록뽈록 용출(湧出)하여,
우리는 민족적으로 취하여,
정치 경제 군사 또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신명을 풀무질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의 정치적 백치
뒤에 오면서 늘어나는 과잉 능청 그런 것들은
`악덕의 영양분‘으로 섭취하는 게 좋으리.
용서를 빈 바도 있으시고
브레히트의 `쉰 목소리‘도 그럼직하며
관용은 정의를 비로소 정의롭게 하리니)
어떻든 잘 익은 술이나 김치의 맛과도 같이
그다지도 곰삭은 그의 노래의 맛은
느낌의 영매(靈媒)의 이 또한 곰삭은 몸과 마음에서
샘솟아 흘러나온 것이니
괴로우나 즐거우나
세상살이의 맛을 한결같게 하는
노래의 일미행(一味行)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감정이거나 욕망이거나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그 노래에서 새로 태어난 사물의 목록
그 탄생의 미묘한 파동의 목록을 우리는 아직
다 작성하지 아니했느니.
(한 나라 한 부족이 대접을 받으려면
문화적 보물이 있어야 한다는 건 뻔한 얘기)
나는 술잔을 앞에 놓고
한국어의 한 자존심 그 보물 중에서
내 십팔번 <푸르른 날>을 불러본다.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견딜 수 없네, 문학과지성사, 2013
마지막 문장 [김은지]
엄마가 당신이 쓴 시를 읽어 보라고 줬다
나는 다 좋은데 마지막 문장이 좀 뜬금없다고 했다
엄마는 니가 뭘 아냐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문에서 읽어 온 시가 얼마며,
두보도 서정주도 다 읽은 사람이고
문창과에 다닌다는 애가 이제 보니 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네, 라며
엉크렇게 화를 냈다
그게 아니라 나느 일이삼사 연이 다 좋다, 다 좋은데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고
마치 내가 금강산을 다녀온 느낌까지 들었다
이런 표현은 어떻게 떠오른거냐, 찬찬히 내 감상을 전한 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마무리는 일기 같다랄까 아쉽다고 했다
엄마는 그러니까 니가 시를 뭘 아냐며, 내가 지금까지 신문에서 읽어 온 시가 얼마며
두보도 서정주도 다 읽은 사람이고
봄가을이면 백일장에서 매번 상금도 타 오고
누구 엄마도 읽어 보더니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쓰냐며 그랬는데 넌 뭐냐, 라며 화를 냈다
엄마가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니
내가 뭐 시를 못 썻다고 한 것도 아니고
한 문장 정도 이견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냐
문장을 지적하는 게 이렇게 기분 나쁜 거였나 문창과 친구들은 정망 강철 심장을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차릴 때엔 한발 물러나
엄마, 아마 내가 시를 많이 못 읽어 봐서 이런 표현 방식에 익숙하지 못한가 봐요,
어렵게 말을 건네 봤다
그러자 그건 정말이지 니가 몰라서 이해를 못하는 거다, 라며
그 마지막 문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엄마가 이렇게 오래 화를 안 푸는 사람이었다니
나는 처음으로 엄마가 아니라 허만분 씨를 화나게 만들었다
엄마 다시보니 마지막 문장이 괜찮아요
어제는 미안해요
다음 날 사과까지 했지만
사과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엄마는 계속 시를 쓰고 있다
엄마가 어마 얘기 글로 쓰지 말라고 볓 번이나 말했는데
자꾸 엄마 얘기를 쓰게 된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일기 같지도 않았다
- 2016 문예지 신인상 당선시집, 서랍의날씨,2017
심심했던, 시시했던 하루의 소사 [강세환]
오늘 당신 기다리는 동안 중얼거린 것들
어디서 읽었을까 누가 말했을까;
시인은 무당이에요 시인은 바다제비에요
우리 젊은 날 불렀던 유행가 한 구절;
오늘도 젖은 짚단 태우 듯……
우연히 눈에 띄던 신문 한 귀퉁이;
우린 영혼이 없는 공무원입니다
나의 시는 영혼이 없는/있는 걸까
내 앞에 누군가 뱉었던 한 마디;
시인은 즉흥적이야 어디로 튈지 몰라!
현대문학 1월호 김이정 단편 마지막 문장;
당신, 내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오늘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중얼거린 것들
휠덜린 얹혀살던 옥탑 방 몇 평일까
74년 재수할 때 청계천 헌책방서 구입한
56년 정음사판 『서정주시선』 속표지
미당 친필 이영진 대인大仁은 누굴까
요번엔 해남 갈두리까지 한방에 갈 수 있을까
지난여름 내몽골서 함께 사진 찍었던
식당 여종업원 이름이나 물어 볼 걸……
제 이름은 허공의 바람 같은 거예요
정선 문두계곡엔 어떤 바람이 머물다 말까
오후 1시 수락산 입구에 불을 밝힌
가로등은 내일도 멍청하게 서성일까
아무도 기웃대지 않던 주공 14단지 쪽
고고한 까치집은 그 누구의 처소였을까
- 벚꽃의 침묵, 황금알, 2009
나목裸木 [박라연]
서정주는 선운사를 끼고 신경림은 남한강을 끼고 태어났는데
술 만드는 집에서 태어난 나는 서늘한 눈빛만 보면 쉽게 취하는데
소나무, 그 중에서 벼락맞은 소나무로 악기를 만들면 소리가 절창이라는데
상처 깊은 영혼이 뿜어내는 노래 그림 연기 또한 그러할 텐데
왜 무공해 식품만 먹고 싶어하나?
유순 칠순 팔순이 되어가는데도 삶의 잎새가 바람에 찰랑대는 사람을
보면 저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아직도 살날이 창창히 남았다 싶은데
왜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몇 방울밖에 안 남은 작은 물방울로만 느껴지나?
山은 짙은 안개로 슬픔을 표현하다가 그래도 견딜 수 없을 때
펑펑 물줄기로 바뀌어 아픔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제 몸 구석구석 을 계곡처럼 흘러넘치게 하는데
왜 안개도 물줄기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눈이 사시라서 물체를 제대로 못 알아보는 맷돼지처럼
쓰러지고 싶어지나?
-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문학과지성사.1999
꽃말 [이향아]
흑장미 같은 카르멘은 적동빛 살결
붉은 입술에 꽃을 물고 춤을 추었다.
오필리아는 호숫가에 수련처럼 떠서
못 이룰 사랑 때문 미쳐 죽었다.
러시아 어디쯤에 수선이 필까
수선 피는 물가에 지바고가 서서
라리사, 라리사, 외쳐 부를까.
꽃말들이 틀려서 외우기가 싫다.
해바라기는 사자나룻 같은 얼굴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시는, 예수님의 말씀
선운사 육자배기 서정주의 동백꽃도
꽃말이 모자라서 사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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