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동네 서점에서 [김상미]

JOOFEM 2024. 10. 14. 22:09

 

 

 

 

 

동네 서점에서 [김상미]

 

 

 

 

―할아버지, 시집 한 권 추천해주세요.

  ―어떤 시집?

  ―제목 근사한 것으로요.

  ―제목 근사한 시집이라...... 이게 우리집에 있는 시집의

전부인데...... 아가씨가 직접 골라보게나.

  ―그러죠. 시집들이 참 예쁘네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너와 함께라

면 인생도 여행이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아직 피지 않

은 꽃을 생각했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지옥에서 보

낸 한철/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

 

 ―어쩜 시집 제목들이 하나같이 다 길고 멋지죠? 마치 근

사한 기차에 올라탄 기분이네요.

 ―그러게. 우리 땐 시집 제목이 대부분 명사였는데......

제목 긴 게 요즘 추센가보이. 그래, 어떤 걸 골랐소?

 ―다 멋진 제목들이지만, 그중 제일 짧은것으로 할래요.

지옥에서 보낸 한철!

 ―그건 외국 시집인데?

 ―알아요. 하지만 이 제목이 저와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사는 곳이 지옥이거든요.

 ―젊은 아가씨가 무슨......

 ―정말이에요. 훨훨 날고 싶은데 날개도 다리도 다 잘린,

하는 일마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모든 게 캄캄해서 숨

을 쉬고 있는데도 죽은 것 같은, 그런 지옥을 국경 너머 외

국 시인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지금의 제 세계와 어떻게 다

른지...... 무척 궁금해지거든요. ...... 그리고 할아버지, 이

시집 다 읽고 나면 다음번엔 제목에 '천국'이 들어가 있는

시집, 사러 올게요. 꼭 갖다놓으세요.

 ―허허, 그러지요. 지옥 다음에 천국이라...... 아주 재밌

는 아가씨군. 허허.

 

 

                    -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문학동네, 2022

 

 

 

 

 

 

 

 

 

* 시집 제목만 긴 게 아니라
시 자체가 거의 수필 한 편이나 될 분량으로 긴 시를 쓰는 요즘이다.
시민이 읽거나 말거나 글 솜씨를 뽐내는 게 유행인가 보다.
브레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보면
피트의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글을 써와라, 숙제를 주고 써오면 반으로 줄여라,
그래서 반으로 줄여 오면 또 반으로 줄여라!라고 한다.
군더더기 같은 문장으로 본질을 흐리지 말라는 것 같다.
지금의 시가 읽다 보면 본질은 어디로 사라지고 누덕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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