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황유원]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그 풀이 뚝, 뚝
끊기는 소리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치던 피아니스트의 굽은 오른 손은
불어오는 바람에 서서히 펴져
나무처럼 자라오른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이제는 한가한 게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게 된 나는
저 양들을 보며 비로소 무언갈 깨달아간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연주는 얼마나 놀라운가
풀 한포기 없는 방을 풀밭으로 만들어 놓고
천장을 본 적 없는 하늘빛으로 물들이는 이 연주는,
머릿속을 점령한 채 계속 날뛰는 무가치한 생각들을
스르르 잠들게 하는 이 연주는!
음악은 연주와 더불어 잠이 들고
양들도 이젠 다들 풀밭에 무릎 꿇은 채 그만
잠이 들어
풀 뜯는 그 모습 더는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이제 한동안 음악 없이도 양들이 한가로이 풀 듣는 모습
머릿속에 그릴 줄 알게 된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나는 그 풀이 된다
* 바흐 「사냥 칸타타」 BWV 208에서
-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모든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의 비탈진 산이라고 양들이 일년 내내 풀을 뜯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중동지방의 양들은 사막 같은 곳에서 일년중 우기 때만 잠깐 비가 내리고
비온 뒤 쑥쑥 자라난 풀들을 먹을 수 있다.
푸른 들판에서 여유로울 때도 있지만 혹한기에는 눈속에서 풀을 찾을 수 없다.
피아니스트 또한 한가로이 연주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치면 손끝에 못이 박히고 새끼손가락의 힘이 부족해 더 힘을 주고 쳐야 한다.
보는 이는 느긋하게 연주하는 것 같이 느낄 수 있지만 치는 이는 온힘을 다해 치는 것이다.
가끔 한가로이 지내는 때를 즐겨야 하고 그게 행복한 순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참 무더웠던 올해의 여름을 이제 겨우 벗어나 구절초도 보고 벤치에 앉아 책도 읽을 수 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지 않은가.
국화꽃 좀 감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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