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원의 왕 [문성해]
한 사람이
공원 벤치 위에 앉아 있다는 건
그에게도 귀속할 세계가 생겼다는 거
그의 발치 아래 모여드는 비둘기들이 있다는 거
그의 정수리 위로 뾰족한 주둥이를 들이대는 별과
그의 그림자로 섞이는 그늘이 생겼다는 거
이 소읍
한 사람이 오래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는 건
호수 위로 고개를 쳐드는 자라와
비늘 뜯겨진 물고기들과
엷은 빛깔의 옷감을 준비하는 수련들이
누군가의 홍채 안에 수런거리며들어선다는 거
한 사람이 공원 벤치 위에 길고 지루하게 앉아 있다는 건
그의 사정거리가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고 있다는 거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쓸쓸하고 오래된 공원에서
오직 한 사람의 관객인 그를 위해
조연이 되어 주는 것들이 있다는 거,
총칼이 아니라도 매일매일 넓어지는 영토가 있다는 것
한 사람이 공원 벤치 위에 진종일 앉아 있다는 건
어떤 오후가 전쟁도 없이 평화롭다는 거
계절은 오고 가고
오래된 대관식에서 입었던
단벌의 외투와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짚고
응시와 사색의 제왕인 그가 앉아 있다
- 너를 다시 물고기로 만들고 싶어서, 시인동네, 2025
* 일천구백팔십사년, 나는 4학년이 되어 가을날의 벤치에 자주 앉았었다.
그 벤치는 공대 건물 앞의 맨 끄트머리의 벤치.
졸업한 선배가 늘 앉아 있던 자리이고
그 벤치의 이름은 유상의 벤치였다.
주유상 선배가 늘 앉아서
사색을 한 건지 공부를 한 건지 연애편지 따위를 읽은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늘 그 자리 그 벤치를 앉아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 유상의 벤치.
나도 한 해를 그 벤치에 앉아 시를 쓰기도 하고 읽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졸업하고 그 유상의 벤치를 누가 앉았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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