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카즈베기에는 저녁이 오고 [나희덕]

JOOFEM 2026. 3. 25. 21:02

 

 

 

 

 

카즈베기에는 저녁이 오고 [나희덕]

 

 

 

 

눈 덮인 카즈베기 산정,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곳

 

위대한 도둑질의 대가로 바위에 묶인 채

날마다 되살아나는 간을 독수리에게 쪼아 먹히던 곳

 

이제 제우스도 프로메테우스도 독수리도 보이지도 않는다

 

바위만 남아 조금씩 자라났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처럼

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바위를 쪼다 날아갈 뿐

 

카즈베기에는 저녁이 오고

회양목 안에 숨겨진 불이 하나둘 켜지고

 

오래전 판도라의 상자에서 흘러나왔던

질병과 고통, 불행과 가난, 전쟁과 폭력이

계곡 아래 퍼져가고

 

신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잊힘으로써 버려진 것이다

 

버려진 신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성스런 한밤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나아가는

바쿠스의 성스러운 사제*처럼 기다려 보지만

이따금 차오르는 빛의 기운을 느끼기도 하지만

 

신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계곡 아래 희미한 불빛들만 위태롭게 깜박일 분

 

* 프리드리히 휠덜린, 「빵과 포도주」

 

 

                    - 시와 물질, 문학동네, 2025

 

 

 

 

 

 

* 봄이 왔다고 회양목의 노란꽃들을 찾아 꿀벌들이 게으르지 않게 먼길 달려와

정신없이 꿀을 빨고 있습니다.

겨우내 얼마나 춥고,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요.

많은 꿀은 아니지만 배불리 먹고 가면 좋겠군요.

 

카즈베기에도 저녁이 온다는데 지구는 온통 전쟁과 고통으로 위태롭군요.

이 어둠이 걷히고 정말 눈부신 아침이 밝아올까요?

신이 주는 한수가 정말 묘수가 되어 한꺼번에 평화와 풍요가 찾아오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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