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물의 경전 [이대흠]

JOOFEM 2026. 3. 13. 13:53

물방울 화가 김창열

 

 

 

 

 

 

 

물의 경전 [이대흠]

탐진 시편2

 

 

보아라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꽃이었다가 잎이었다가

녹슨 칼처럼 굳은 혀였다가

흙이 되는 말씀을

언제 어느 때고 세월은 도둑처럼 다녀가고

물의 말씀을 화석으로 남기려다가

끝내는 물이 되어 흘러가는 무모한 사람들

마저도

물의 경전에서는 살아 있나니

보아라

서러운 것

바라는 것

생의 환희 같은 것이

다만 여백으로 기록되는 물의 경전을 보아라

바서지면 촤르르 방울 소리 같고

튀어오르면 동글 별 싸라기 같고

싹의 숨결 같은 말씀들이 또랑또랑 모여서

지금 흘러가고 있지 않느냐

외로운 자들이 흘려보낸 귀가

물낯에 노을 비늘로 듣는다

떠났던 소년들의 종아리가

여기 돋아나온다

가장 미워했던 얼굴이

연둣물 들어 햇잎으로 오고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눈동자를 잃고 흐리로 괸다

사랑했던가?

행복했던가?

물으며 묻지 않으며

다시 태어나는 한방울의 죽음

모래알 같은 환희를 씻는

물의 경전을 잃어라

                 -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창비, 2018

 

 

 

 

 

 

* 신정호수에 가면 물의 경전을 읽게 된다.

반짝이는 윤슬과 찰랑거리는 물춤이 마음을 한없이 가라앉힌다.

오리는 궁뎅이를 보여주며 물질을 하고

뱁새눈을 뜬 재두루미는 물고기를 허겁지겁 잡아먹는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들은 걱정이 없다.

평화로운 신정호수에서는 딱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겸허하게 경전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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