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김광규]
한 줄의 시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 세상의 모든 종이를/죄다 불태운다면/역사는 사라지고/
언어는 절룸발이가 되겠지/
그래도 잊지 못해 연필로라도 끄적일 거고/
눈이 오고 비가 오고/그리하면 지워질 것을/
시인은 그래도 잊지 못해/
그 때 그 자리에 또 끄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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