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사랑이 나가다[이문재]

JOOFEM 2007. 7. 20. 21:12

 

 

 

 

사랑이 나가다[이문재]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의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을 놓치면

오늘을 붙잡지 못한다

나를 붙잡지 못한다

 

 

 

 

 

 

* 그 옛날, 버드나무 있는 우물가에서 수줍어하는 처녀가

  멋진 도령에게 잎하나 띄운 냉수 한사발 건네주고

  자기의 하얀 손도 고개돌려 건네주던 때가 있었지.

  내 손을 당신께 드려요,

  가져 주세요,

  손을 잡는 것은 사랑을 얻는 것이요,

  손을 잡히는 것은 사랑을 주는 것이니

  손을 잃는 것은 사랑을 잃는 것이지.

 

  그 옛날, 좋아하는 처녀의 손을 잡으려고

  몇년이고 망설이고 망설이고 애를 태우던 때가 있었지.

  사랑을 잡으려고

  하얗고 고운 손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언제나 잡아볼 수 있을까 가슴 벅차올 때,

  호주머니안에서 차디찬 손을 따뜻하게 해 주었지.

  손을 잡았고 사랑을 얻었지.

  사랑은 그렇게 오고야 마는 것,

  손은 그렇게 잃지 말아야 하는 것,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8월/오세영  (0) 2007.08.02
형설서점[양동식]  (0) 2007.07.26
조그만 사랑노래[황동규]  (0) 2007.07.17
청솔 그늘에 앉아[이제하]  (0) 2007.07.14
멀리 있는 무덤[김영태]  (0) 2007.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