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신화[현남주]
전갈(傳喝) [이병률]
겨우 남긴 몇천원으로는 택시를 탈 수 없겠다 싶어
서둘러 술자리를 벗어나
다급한 형편 되어 전철역을 찾는다
먹물 같은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밤
을지로3가 지하도에 들어서니 이불이며 상자조각들을 펴던
부랑인 가운데 한 사내가
긴 지하도 저편에 대고 외치고 있다
-거기 시청 앞 용식이 아침에 밥 먹으러 3가로 오라고 해, 꼭
그 말을 받은 2가의 부랑인이
1가 쪽을 향해 소리치니 메아리가 메아리를 끌어안는다
-거기 시청 앞 용식이 아침에 밥 먹으러 3가로 오래
아쉽게도 꼭이란 말은 생략되었으나
1가의 부랑인은 시청 지하도 쪽으로 목청을 높이며
꼭이란 말을 보탰을 것이다
지하도가 굽은 길이 아니어서
마지막에 듣는 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한밤
표를 끊을 새 없이 겨우 몸을 실은 마지막 전철에서
먼 곳으로부터 메아리를 싣고 달려왔을
바퀴들의 수고가 고마워
나도 모르게 숨이 가지런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를 불러
따뜻한 국밥 두 그릇 시켜 천천히 먹자 하고
나도 나에게 전갈을 보낸 뒤에
길고도 아름다운 메아리가 도착한 종점 즈음에다
자리를 봐야겠다
* 인간의 욕구중에 가장 일차적인 욕구가 식욕, 수면욕, 배설욕이다.
지하도에서 노숙자로 산다해도 그들에게는 먹는 일이 최고다.
그리고 추위에 견디며 잘 수 있는 공간이다. 이건 지하도가 딱이다.
이게 해결만 되면 그 다음으로는 안정욕,소속욕이다.
을지로 지하도에서 각각 자기의 영역을 지키며
을지로라는 소속감으로 살아간다.
더이상 무엇을 바라리요.
그러니 지상으로 소풍 올만 할거다.
일천구백팔십칠년 처음으로 일본을 갔을 때
도쿄와 오사카에 박스족이 많았다.
그 노숙자들은 양복도 입었고 정신도 멀쩡해 보였었다.
편안해 보이는 그들은 와루바시만 들고 비닐쓰레기봉지를 뒤지면 먹을 게 참 많이 나왔다.
이제는 한국에도 고급스러운 노숙자가 많아졌다.
어디고 한군데 소속만 되면 먹을 게 천지다.
교회 몇군데만 돌면 세끼 식사가 해결되고
조금만 불쌍한 척 하면 소주가 세병이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어보이는
저 노숙자들이 주는 전갈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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