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별을 굽다[김혜순]

JOOFEM 2008. 5. 1. 07:57

 

 

 

 

 

 

 

별을 굽다[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속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 어디론가 향하는 저 수많은 별들은 붉은 흙 가면을 쓴 채

힘을 가지고 움직여진다.

한 방향은 아닌 듯 서로 다른 표정으로 자기의 길을 간다.

- 혹시 이 ㄴ이 나의 예쁜 다리를 훔쳐보고 있나,

한 여자가 의심의 눈초리로 한 남자를 째려보지만

- 아니예요,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그래요,

손사래를 치며 그 한 남자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서 있다.

- 다음 정거장에서 이 ㄴ이 자리를 내주려나,

아픈 다리를 걱정하며 자리 나기를 기다리는 저 무심한 가면, 속의 시나리오 1,시나리오 2

- 어림없지. 난 정거장 끄트머리에서 내리거든. 다리 아파도 참아.

버티는 저 가면, 속의 쾌재.

아침은 늘 그렇게 무표정한 가면 뒤로 바쁜 일상이 숨어 있다.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구워내진 가면은 우리의 일상이 묻어있고

우리는 오늘도 불가마니 있는 곳을 향해 바삐 움직인다.

움직일 때마다 뜨거, 아 뜨거

구워지고 있는 붉은 흙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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