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눈빛[김혜순]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
풍경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질겁했습
니다
내가 성의 계단을 오를 때
내 시선의 높이가 변하면서 풍경이 다르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줄곧 풍경이 눈빛을 바꿔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나에게 성을 안내해주겠다고 내 팔목을 잡아끌며
계단을 오르던 소녀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낮잠 자다 깨어나니 수억만 남자들이
둘러싸고 한꺼번에 내려다보는 듯
우리는 갑자기 통해서 자지러지게 소리쳤습니다
소녀는 놋쇠 거푸집 하나에 꼭 들어맞을 만한 작은
종처럼
세차게 울다가 소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곤 여섯 방향에서 달겨드는 풍경의 화살에 갇혀
더러운 손톱을 빨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안내해주었으니 돈을 달라고 조르던 것도
잊은 채
유충처럼 제 고치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지옥이
성의 발코니 아래로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모두 거짓말이야 하고 바
람이
광대하고 광대한 거짓말인 풍경 속을 날아갔습니다
새들이 내 뺨을 후려치듯 떨어지며 낮은 땅으로 내
려갔습니다
계단마다 바뀌는 풍경의 눈빛이
위아래 사방에서 떨어지는 휘몰아치는 본드처럼
내 전신을 휘감았습니다
*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줄 알았더니, 풍경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니
작용 반작용의 법칙과도 같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줄 알았더니,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었다니
하늘과 땅이 맞닿았다는 거다.
지평선의 끄트머리같은......
'풍경의 눈빛'을 읽으면서
중국 이화원에서의 느낌이 다가온다.
성채를 오르면 오를수록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점점 다르게 느껴진다.
한국의 비원과 비교되는 이화원은
크기가 꼭 한국과 중국의 차이만큼 다가온다.
광대한 호수는 하늘과 맞닿아있는 수평선이 보일만큼 광대하다.
저 호수를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채찍질을 당했을까,
이 높은 성곽을 쌓느라 얼마나 많은 땀이 이 바닥을 적시었을까,
수억만 남자들이 다녀가고 앞으로도 다녀갈 이 풍경에
눈길만 흘낏 주며 애써 외면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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