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암[이성선]
달의 여인숙이다
바람의 본가이다
거기 들르면 달보다 작은
동자스님이
차를 끓여 내놓는다
허공을 걸어서 오지 않는 사람은
이 암자에 신발을 벗을 수 없다
* 산에서는 빈 마음으로 사심없이 사람을 사귈 수 있다.
일천구백팔십일년 친구 둘과 배낭에 쌀만 넣고 설악산을 오른 적이 있다.
백담사에서 대청봉을 오르고 봉정암에서 하룻밤을 잤다.
같은 방에 중대의대생 두명, 숭실대 두명, 세무서 여직원 두 명, 그리고 조리 신고 혼자 온 자칭 태권도를 한다는
여자(그 땐 스물 일곱의 나이인데 어쨌든 한참 누나였다.)를 포함 열명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같이 밥해먹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설악산을 하산할 때까지 같이 다녔다.
하산해서도 큰 여관에서 다같이 자고 경포대까지 가서 노래부르며 놀았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사실 이름도 모르고 안다해도 기억이 없지만 짧은 인생에 스치듯 친구가 된다는 것은 굉장한 인연이다.
세무서 여직원과 둘이서 설겆이 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눈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십팔년전 일이다.
다들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거라 믿는다.
바람이 지나간 봉정암, 즐거웠던 봉정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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