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유디트'
* 클림트전을 보면서 유디트,라는 그림은 설명을 듣지 못해 그게 뭘 말하는 건지 궁금했다. 여인이 손으로 움켜쥔 것은 분명 사람의 목인데..... 혹시 루 살로메인가, 하여 유디트를 검색해 보았다.
아래 내용은 스크랩해온 글과 그림이다.(최도빈씨라는 분의 글로 강의하시는 분 같다.)
개신교와 가톨릭 성서의 차이를 알게 된 덕분에 미술사 수업 중 귀찮아서 찾지 않았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무수한 그림이 남아 있는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분명 이 정도로 그려진 주제라면 성경에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해답은 가톨릭 외경에 있었다. 외경에는 “유딧”이라는 경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당연히 옛 화가들은 이 외경을 보았을 테니 자연스럽게 이 주제를 화폭에 옮겼던 것이다.
“유딧” 외경의 내용은 유대의 산악도시 베툴리아에 살고 있었던 과부 유디트가 베툴리아의 모든 보급로를 막고 고사시키기 위해 진을 치고 있던 아시리아의 막사로 홀로 들어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꾀어 만취하게 하고는 목을 베는 내용이다.
고사 작전에 기진맥진한 베툴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이 닷새 안에 도움을 주시지 않는다면 항복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유디트는 이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는 연설을 한다. 그래도 생존의 위협에 시달린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자, 자신이 오늘 밤 한 가지 일을 이루겠다고 말한다. 밤이 되자 유디트는 과부의 옷을 벗고 몸단장을 한 후 음식 주머니를 든 하녀와 함께 적진으로 향했다. 보초병부터 유디트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탄복하였다. 베툴리아 정복의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며 홀로페르네스에게 다가간 유디트는 미모와 말솜씨로 적장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계략을 알려 준 후, 유디트는 자신이 싸간 음식을 먹으며 막사에 기거한다. 나흘 째 되던 날 몸이 단 홀로페르네스는 다음과 같이 내시에게 시킨다.
“○ 네 책임하에 있는 저 히브리 여자에게 가서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자고 타일러라. ○ 그런 여자와 한번도 놀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우리의 수치다. 데려오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 여자가 우리를 비웃을 것이다.”(유딧, 12:11-12) 하여간 남자들의 착각은... 참 같은 남자지만 너무 적나라한 묘사이다. 그래서 “유딧이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 여자를 보고 홀로페르네스는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동요되어 함께 자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실상 그는 그 여자를 보게 된 첫날부터 그 여자를 유혹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12:16) “유딧은 자기 하녀가 준비 해온 음식을 받아, 홀로페르네스 앞에서 먹고 마셨다. ○ 홀로페르네스는 그 여자 때문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그는 포도주를 마음껏 마셨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단 하루도 그렇게 많이 마셔본 일이 없었다.”(12:19-20)
홀로페르네스는 필름이 끊겨서 숙소에서 뻗었고 유디트만이 그 옆에 남았다.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맡에 있는 침대 기둥 쪽으로 가서 거기 걸려 있는 그의 칼을 집어내렸다. ○ 그리고 침대로 다가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오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홀로페르네스의 목덜미를 두 번 내리쳐서 그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 그리고 나서 그의 몸을 침대에서 굴러내리고 기둥으로부터 휘장을 걷어서 치워버렸다. 잠시 후에 유딧은 밖으로 나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기 하녀에게 주었다. ○ 하녀는 그것을 곡식 자루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기도하러 다닐 때처럼 함께 밖으로 빠져나왔다.”(13:6-10)
베툴리아로 돌아온 유디트는 적장의 머리를 보여주며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계략을 알려준다. 남자들이 날이 밝자마자 성 밖으로 무기를 들고 나서면 적들이 동태를 보고하러 홀로페르네스의 막사로 들어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렇게 하자 적군들은 “저 노예들이 전멸을 당하려고 감히 우리에게로 내려와 싸움을 겁니다”(14:13)라며 장수에게 보고하러 간다. 보고자는 분명 장수가 유디트와 잠을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조심스럽다. “○ 바고아는 천막문을 두드렸다. 그는 홀로페르네스가 유딧과 함께 자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아 문을 밀고 침실로 들어가 보니 홀로페르네스는 머리가 달아난 채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14:14-15) 게임은 이렇게 끝났다. 적병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멀리까지 쫓아가 그들을 “쳐죽였다.”
어떤 미술사 책은 유디트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전한다.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격렬한 정사를 나눈 후 그가 곯아떨어진 틈을 노려 목을 잘랐다는 것이다. 몇몇 그림들에 나타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의 표정에서 단지 고향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행동만은 아니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유디트는 자신의 몸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분노를 실어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더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외경에서 전하는 말은 그렇지 않다. (물론 외경의 기록이 유디트의 명예를 위해 치장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유디트는 성으로 무사히 돌아간 후 경과를 알려주며 “내 길을 걸어갈 때 나를 지켜주신 주님 만세! 내 얼굴이 그를 유혹하여 그를 죽게했을망정 그는 나를 범하여 더럽히거나 욕을 보이지는 못했습니다.”(13:16) 게다가 이 일로 유명해진 유디트는 “자기를 탐내는 남자가 많았지만 그 여자는 아무하고도 관계하지 않았다. 므나쎄가 죽어서 조상들 옆에 묻힐 때부터 일생 동안 줄곧 혼자 살았던 것이다.”
일단 두 그림을 보면서 차이를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유디트의 표정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에서는 종족을 위해 적장의 목을 치지만 살인 행위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가녀린 여인네의 표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러나 젠텔레스키의 그림에서는 악을 제거하는 강인한 여성의 이미지가 묻어난다. 젠틸레스키가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라고 불리우기 때문인가? 그 이유는 다음 그림에서...
1.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디트와 하녀>, 1612
2.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 1629
3. 루카스 大 크라나흐, <홀로페르네스의 목과 유디트>, 1530
분명한 것은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여전히 여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돌팔매를 오른 어깨에 걸치고 골리앗을 주시하고 있는 모습과 같은 자세로,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칼을 어깨에 걸치고 아직도 분노가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장막 밖에 동태를 살피며 거사 후의 상황을 주시한다. 하녀가 쥔 바구니에 담겨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은 이 그림의 주제를 제시할 뿐 전혀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유디트의 목울대와 강력한 턱선,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는 전사의 몸에 가깝다.
젠틸레스키는 당시 '세기의 강간 사건'으로 불린 치욕적인 강간 소송이 끝난 직후 이 주제의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렸다. 젠틸레스키는 화가였던 아버지가 붙여준 원근법 선생 아고스티노 타씨에게 19세에 겁탈을 당했다. 그러나 법은 여성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재판소는 오히려 그녀에게 고문을 가해 고소를 취하하게 만들었고, 범인은 무죄 방면되었다. 그 이후로 폭력적인 남성에게 보복하는 이 주제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처럼 신체적 우위를 무기로 여성을 짓밟는 남성을 죽이는 유디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딸이 세간의 이야깃거리가 되자 아버지는 서둘러 피렌체의 화가 피에트로 스티아테시에게 시집을 보냈고, 그리하여 젠틸레스키는 치욕적인 기억만 준 고향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당시 피렌체 최고의 화가는 첫 번째 그림을 그린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였다. 그는 젠틸레스키의 재능에 반했고, 그녀의 소문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평생 한을 지니고 산 젠틸레스키로서도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이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사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알로리의 유디트는 너무나 아름답다. 성경에서 말한 유디트의 미모를 그대로 그린 듯하다. 하지만 이 그림은 실연 당한 알로리의 애가이다. 젠틸레스키가 자주 그린 유디트의 주제를 차용하며 유디트 얼굴에는 젠틸레스키의 모습을, 그녀에게 목베임을 당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실연당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 얼마나 애절한 그림인가. 그 시대 최고의 화가라던 알로리의 그림은 미술사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이 그림만은 그의 사랑을 담아, 마음의 아픔을 품고 그의 이름과 함께 전해진다.
3번 크라나흐는 뽀나쑤. 모든 인물을 자기 스탈대로 그려버리는 크라나흐가 넘흐 좋아요.
이외 유명한 작가들의 유디트 그림들...
1. 산드로 보티첼리, <베툴리아로 돌아가는 유디트>, 1472
2.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9
- 쟁반에 올려진 게 홀로페르네스의 목, 침대에 뒹구는 건 몸뚱이
3. 도나텔로, <유디트와 홀로페르노스>, 1460
4. 틴토레토, <유디트와 홀로페르노스>, 1579
- 전형적인 매너리즘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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