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팔월에 펄펄[최정례]

JOOFEM 2010. 1. 20. 22:36

 

 

 

 

 

 

 

 

팔월에 펄펄[최정례]

 

 

 

 

팔월인데 어쩌자고 흰눈이 펄펄 내렸던걸까

어쩌자고 그런 터무니 없는 풍경 속에 들었던 걸까

 

창문마다 흰눈이 펄펄 휘날리도록

너무 오래 생각했나 보다

네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되도록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하나가 되어 이젠

얼굴조차 뭉개지고

눈이며 입술이며 머리카락이며

먼지 속으로 흩어지고

 

비행기는 그 폭설을 뚫고

어떻게 떠오를 수 있었을까

소용도 없는 내 조바심

가 닿지도 않을 근심을 태우고

 

오늘은 자동차에 짐보따리를

밀어넣고 차문을 닿았는데 갑자기

열쇠가 없었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망치 소리같은 게

철판을 자르는 새파란 불꽃같은 게

나를 치고 지나갔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길을 되짚어 다니면서 물었다

 

무엇이 할퀴고 지나간 다음에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달리는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면서

바람도 없는데 서 있던 나무는

갑자기 이파리를 부풀어 올리고

 

그 때 어쩌자고 눈발은 유리창을 때리며 나부꼈나

세상에 열쇠라는 것은 없다

가방도 지갑도 머릿 속도 하얗게 칠해지면서

 

 

여름의 한 중천에서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 요즘 아이들은 황당하다,란 말을 참 자주 쓴다.

이제는 아예 방송에서조차 황당,이란 낱말을 쓴다.

사전에 없는 말도 자주 사용하다보면 등재가 되긴 한다.

요즘 국어사전엔 황당하다,가 있긴 하다.

황당무계하다,란 말은 있어도 황당하다,란 말은 전에 없었다.

 

우리는 살면서 황당무계한 일을 많이 당하게 된다.

최시인은 터무니 없는 풍경이라고 표현했는데

터무니,란 어떤 근거를 말하는 것이므로 근거없는 풍경을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어처구니 없는 풍경,이라고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요즘 아이티라는 섬나라가 이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으며 황당무계한 일을 당하고 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거리에는 죽은 사람들이 즐비하게 누워있고

사람들은 집도 식구도 식량도 마실 물조차도 없는 그런 풍경안에 갇혀 있다.

머릿 속이 하얘지는 상황은 사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북한으로 납치되어간다거나

타고가던 비행기가 멈춰버리거나

도로가 푹 주저앉거나

메뚜기떼가 떼지어와서 닥치는대로 물어뜯는다거나

쓰나미처럼 순식간에 해수욕을 즐기는 이들을 바다로 쓸어가거나

치매에 걸려 더운 여름날 겨울양복을 입고 나가서 먼 동네 아무집이나 들어가서 눕는다든지.......등등 

팔월의 크리스마스는 낭만도 아니요, 팔월의 흰눈이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닥칠 개연성 앞에서 그럴 수도 있음을 알고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 여름의 한 중천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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