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고양이가 울었다[이병률]

JOOFEM 2010. 2. 25. 22:39

 

 

 

 

 

 

 

고양이가 울었다[이병률]

 

 

 

 

고양이 한 마리가 동네 골목에 살았다

검은 비닐봉지와 살았다

 

검은 봉지 부풀면 그것에 기대어 잠들었고

검은 봉지 위로 빗물이 떨어지면

그것을 핧아 먹으며 살았다

 

어느 날 검은 봉지가 사라졌다

바람에 날리기도 하였을 것이고

누군가 주워가기도 하였을 것이나

아주 어려서부터 기대온 검은 봉지를 잃은

고양이는 온 동네를 찾아 헤매다

죽을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검은 봉지를 형제 삼아 지내온 날들

고양이가 울었다

잠든 형제를 위해 자꾸 자리를 비켜주던 날들

뼛속으로 뼛속까지 바람이 불었다

 

 

 

 

 

 

 

 

* 인생을 살면서 나에게 마음을 주는 건 아닌데

나혼자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있을 게다.

검은 봉지처럼 저혼자 무심하게 지내는데  기대기도 하고 핧아먹기도 하는 그런 것......

요즘은 우표를 모으는 사람은 없지만 우표 모으는 사람, 딱지 모으는 사람, 만화를 모으는 사람,

인형을 모으는 사람, 시집만 딥따 모으는 사람 등등

검은 봉지같은 걸 사랑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무심한 것들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것처럼 기쁨을 주게 되고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 그런 검은 봉지같은 것들을 잃어버린다면 고양이처럼 울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다.

내가 마음을 주는 검은 봉지에는 어느덧 나의 혼이 깃들어서 무심하여도 무심하지 않게 된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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