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상대 [하종오]
옆집 미장이는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앞집 페인트공은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뒷집 잡부는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저마다 배낭을 꾸려서 외지 공사장에 가
열흘이나 보름씩 품 팔고 돌아오다가
내가 녹슨 철대문과 금간 벽돌담을 살피고 있으면
일부러 고개 돌리고 지나가버리지만
큰소리로 인사말을 건네면 겨우 눈인사로 받았다
그들은 나와 걸리지 않고 지내는 법을 알았다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도 밥술 먹는 나를
비오는 날이면 빗줄기나 헤아리는 나를
그들은 맞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놔두는 마당의 풀을 비웃는 그들을
내가 손대지 못하는 낡은 집을 보며 혀 차는 그들을
나도 맞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도 나도 주택밀집도시의 주민이 되기 전에는
고샅길에서 흙 만지며 놀던 어린아이가 아니었을까
온갖 풀꽃 뜯어 회벽에 색칠하던 소년이 아니었을까
헛간에서 막일 거들던 청년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서로 걸리며 지내는 법을 잊어먹었다
내가 집수리를 도급주려는 눈치를 챈 뒤에야
옆집 미장이가 먼저 나를 아는 체했다
앞집 페인트공이 먼저 나를 아는 체했다
뒷집 잡부가 먼저 나를 아는 체했다
*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돈과 사랑이다.
미장이나 페인트공이나 잡부가 나를 사랑할 리 만무하다.
같이 밥먹자, 소리를 할만한 사이가 아닌 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까닭이다.
도급을 주면 사랑하는 체 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돈을 노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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