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왼쪽 왼손 혹은 좌회전

JOOFEM 2010. 2. 26. 21:12

 

                                                                                     오른쪽에 앉아서 왼쪽을 바라보는 여인.

 

 

 

 

 

 

 

왼쪽으로 휘어진 소나무를 보다[김명기]

 

 

 

 

  고요한 오후 탄력 잃은 햇살이 잿빛 바람에 밀려 세상 밖으

로 소진되어간다

  작은 학교 교정에 앉아 뒷산 둔덕 왼쪽으로 휘어져가는 굵은

소나무를 본다

  세상은 가을이란 절정 끝에 버려진 휴지 같은데 삶의 어느

한 부분 똑바로 서는 것이 똑바로 사는 게 아니란 걸 알아버린

나무는 완강한 푸른 근육을 키워가며 여전히 절정에 들어 있다

  어쩌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극지極止였을지 모른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때 스스로 진화할 수밖에 없는

  왼쪽으로 휘어진다는 건 그런 거다

  걸어가는 것, 손을 든다는 것, 본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그

리하여 마침내 그쪽으로 자라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위험

한 일이었던가

  육신을 재단하려 달려들던 숱한 금기들을 뚫고 소름처럼 낮

게 돋아 온몸을 부르르 떨리게 하던 절정

  그러고 보니 한동안 나의 삶이란 절정과 결별한 은적隱迹이

었구나

  스스로 키워낸 새로운 금기의 칼날이 온몸 구석구석 돋아난

소름을 밀어버린 절정 끝에 버려진 휴지 같은 게으른 생활자

 

 

 

 

 

 

 

 

 

왼쪽으로 가면 화평합니다[이병률]

 

 

 

 

  왼쪽으로 가면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다입니다

  마을을 가려면 삼 일이 걸리고 바다로 가려면 이틀이 걸립니다

  삼 일은 내 자신이고 이틀은 당신입니다

 

  혼자 밥을 먹다 행(行)을 줄이기로 합니다

  찬바람에 토하듯

  나무가 잎을 떨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스친 것으로 무슨 인연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날아오른다고 하여

  이 과도한 행을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을 것인지

 

  물가에 내놓은 나는 날마다 물가에 가 닿지도 못하고

  풍만한 먼지 타래만 가구 옆에 쌓아갑니다

 

  춤을 추겠다고 감히 인생을 밟은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날마다 치명적 오류 속에 있습니까

 

  참으로 나는 왼쪽으로 멀리 가다가도

  막을 수 없어서 바다로 갑니다

 

 

 

 

 

 

 

 

왼손잡이[김광규]

 

 

 

 


남들은 모두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글씨 쓰고
방아쇠를 당기고
악수하는데
왜 너만 왼손잡이냐고
윽박지르지 마라 당신도
왼손에 시계를 차고
왼손에 전화 수화기를 들고
왼손에 턱을 고인 채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느냐
험한 길을 달려가는 버스 속에서
한 손으로 짐을 들고
또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어야 하듯
당신에게도 왼손이 필요하고
나에게도 오른손이 필요하다
거울을 들여다보아라
당신은 지금 왼손으로
면도를 하고 있고
나는 지금 오른손으로
빗질을 하고 있다

 

 

 

 

 

 

 

왼손잡이 사랑[최문자]

 

 

 

 

맨 처음
그대가 왼손으로 서툴게 다가와 시작했으므로
나도 별안간 왼손잡이가 되었다.
왼손이 이렇게 오른손처럼 되긴 처음이다.
그대가 왼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클릭할 때
장난처럼 마구 움직이던
헛짚은 세상
헛짚은 사랑처럼
서로가 서로를 집으려다 배운 헛손질
다 끝나고 나니,
오른손은 왼손의 잔량처럼 작아 보였다.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왼손으로 잘 안 짚히던 그대 놓치고
금방 날아가 죽을 것처럼 푸드득거렸다. 왼손은.
그러다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기죽은 왼손은,
땅 속의 뿌리처럼.
그대와 나,
잘못된 왼손끼리의 어설픈 사랑의 화법은
밤처럼 더더욱 깊어만 간다.
무수히 서로 헛짚고 나서도.
금이 간 오른손의 깁스 붕대를 풀기 전에
나는 그대의 왼손을 잡고 싶다.
다시는 오른손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비보호좌회전 [오 정국]

 

 

 

 


불의 길을 함부로 꿈꾸지 말라
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면이 떨어지고
눈멀고 만다

불의 어두운 욕망이 이길을 지나갔다 비보호좌회전, 도로엔 불의 핥고 간 그을음 같은 건 없었다 타이어 자국을 남겼을 뿐, 사고는 쉽게 처리됐다 비보호좌회전, 그 길은 차선으로 표시되지 않은 춥고 어두운 터널이었다 몇 몇 주민들이 창문으로 목을 내밀었고, 다시 인터넷 채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보호받지 못하는 좌회전, 사내의 죽음은 헐값으로 처리됐다 교차로의 신호등은 90초만에 한 번씩 색깔을 바꾸었고, 견인차에 끌려가는 아반떼의 깜박이등은 여전히 좌회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가 저 길을 꿈꾸었던가
남몰래
숨겨놓은
情婦에게 가는 길
눈 먼 癡情의
詩의 길

 

 

 

 

 

 

 


비보호 좌회전[고 완수]

 

 

 

 


네게로 가는 길은 늘 불안하다

지금껏 탄탄대로였다
거칠 것 없이 질주하다
문득, 정수리를 내리치는
붉은 신호등불 하나

허공에는 화살표들이
고산지대를 묵묵히 오르는
산양의 뿔처럼 걸려 있다
내 심장의 어디를 들이받겠다는
말없는 위협인가

잠시 신호를 기다린다
눈치껏 좌로 꺾으면
네게로 갈 수 있는 길인데도
나는 자주 망설인다

네게로 가는 길은 분명
사랑이라는 이름뿐이지만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은
내 영혼을 덜컹거리게 한다
포장도로에서조차

 

 

 

 

 

 

 


비보호 좌회전 [정 해종]

 

 

 

 


좌회전 표시가 도발적으로 그려진
팻 메스니의 앨범 [턴 레프트] B면 두 번째 곡
[Are You Going with Me?] 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핸들을 왼쪽으로 꺾는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그렇게
노래 부르며 일제히 좌향좌 했던 친구들
멋쩍은 얼굴로 돌아와 넥타이 추켜 메고
얌전히 직장 다니는 녀석들을 보면
나는 늘 왼쪽 옆구리가 가렵다

좌회전이 허용되지 않는 우익의 나라
보호하진 않되 눈감아준다는 건 관용이다
베풀어준 관용에 대해 거듭 감사하며
우연과 필연 사이, 의지와 운명 사이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모든 경우의 악재에 가슴 졸이며
법전의 조항과 조항 사이
관례와 원칙 사이의 공백을
도둑질하듯 잽싸게 핸들을 꺾어
나는 오늘도 무사하게 하루를 살았다 

 

 

 

 

 

 

 

 

병(甁)[류인서]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그들은 늘 그의 오른쪽에 앉는다

  아내 투정도 아이의 까르륵 웃음도

  여름날 뻐꾸기 울음소리도 빗소리도 모두

  그의 오른쪽 귓바퀴에 앉는다, 소리에 관한 한

  세상은 그에게

  한바퀴로만 가는 수레다

  출구 없는 소리의 갱도

  어둠의 내벽이, 그의 들리는 귀와 들리지 않는 귀 사이에

 

  그의 비밀은 사실, 들리지 않는 귀 속에 숨어 있다

  전기를 가둬두던 축전병처럼, 그의 왼쪽 귀는

  몸에 묻어둔 소리저장고

  길게 목을 뺀 말 모자를 푹 눌러쓴 말 눈을 뚱그렇게 뜬 말 반짝반짝 사금의 말 진흙의 말 잎과 뿌리의

말, 세상 온갖 소리를 집어삼킨 말들이 말들의 그림자가 그의 병 속에 꼭꼭 쟁여져 있다

  그것들의 응집된 에너지를 품고 그의 병은

  돌종처럼 단단해져간다

 

  한 순간, 고요한 폭발음!

  소용돌이치며 팽창하는 소리의 우주가 병 속에, 그의 귓속에 있다

 

   

 
 
 
 
 

 

 

 

 

 

 

 

 

* 나는 워낙에 왼손잡이였다.

다섯살 때 왼손으로 밥먹다가 아버지에게 호되게 야단맞고 오른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오른손으로 밥먹고 오른손으로 글씨를 쓴다.

하지만 아직도 왼손을 가끔 쓴다.

야구공을 던지거나 볼링공을 굴릴 때는 왼손으로 한다.

야구배트를 휘두르거나 탁구공을 칠 때는 오른손을 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일종의 양수잡이인 셈이다.

억압에 의해 오른손을 쓰고 있지만 어느덧 오른쪽이 편안해진 나이가 되었다.

왼쪽은 언제나 비보호로 알아서 가라고 한다.

왼손잡이는 그래서 알아서 살아간다.

얼핏 보면 망나니같고 얼핏 보면 자유주의자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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