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 서호시장 근처에 윤이상 기념관이 있다.
모교의 교가는 조지훈작사 윤이상작곡으로 되어 있다.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빛을 보라~~'
해마다 모임 있을 때 숙연하게 부르는 교가.
서울의 초중고대 모두 북악산 아니면 삼각산 아니면 관악산 아니면......산의 정기를 받아 굳세어진다.ㅎ
암튼 윤이상은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통영의 자랑중 손꼽히는 인물이다.
* 1917년에 태어나 14세에 독학으로 작곡을 했다 한다.
철썩이는 통영 앞바다의 파도소리를 스승으로 여긴다니 자연의 제자인 셈이다.
해방후부터 육이오까지는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였고 1956년 프랑스로 가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한다.
* "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 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예민한 오감을 통해 우주가 표현된다는 이 진리!
* 생전에 쓰시던 유품.
지금은 별로 쓰이지 않는 골동품이지만 그 시대에는 대단한 도구들이었을 게다. 소니의 제품이다.
* 1956년 파리음악원에서 수학 후, 1957년 서베를린 음악대학으로 옮겨 보리스 블라허, 라인하르트 슈바르츠 쉴링,
요세프 루퍼를 사사했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시작하였다. 1964년 부인과 두 자녀를 데리고 서베를린에 정착한 윤이상은 오라토리오
'오 연꽃속의 진주여', 관현악곡 '예악'의 연이은 성공으로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서독대통령이 서훈한 대공로 훈장을 1988년 받았다.
* 마지막 육성
" 나의 음악은 악을 배척하고 삶의 승리를 구가하고 슬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인류사회에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욕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고국의 형제 자매 여러분!
부디 나의 음악을 통하여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고 내가 절실히 염원하는 민족의 평화적 사회와 민족끼리의 화해가
하루 빨리 실현 되기를 바라고 또 다 같이 노력합시다. 안녕히......"
* 그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통일을 기다리는 염원으로 가득했다.
음악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승화 시키고 남과 북을 이으려고 노력했던 윤이상.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마음은
음악으로 통일을 염원하였으며 화합의 세계로 문을 열었다.
* 옛날 여권은 지금 것보다 엄청 크다, 거의 노트만하다.
* 어릴 때 사진인 것 같은데 둘중 한 아이가 윤이상이겠다. 오른쪽 같기도 하다.
* 기념관 앞에는 비스듬한 공간이 있다. 가끔 여기서 누가 연주회를 할까.
그늘 밑에는 한 할머니가 편히 쉬고 있다.
* 정일근시인이 쓴 시가 기념관 벽에 붙어 있다.
* 가족사진이다.
"......앞으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가난하지만 물질과 정성으로 우리의 인정을 더 넓힐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은 항상 시야를 남에게도 돌려보는 것.
우리의 아름다워/ㅆ던 봄풀이 싹틀 때 시냇가에서 우리 식구들의 소요가 생각나는구려.
이런 즐거운 생활을......내가 작품을 써서 유명하게 되는 것에 지지 않을 만치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윤이상의 가장으로서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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