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나무의 발성 [박완호]

JOOFEM 2024. 6. 27. 19:47

 

 

 

 

 

나무의 발성 [박완호]

 

 

 

 

씨앗이라고, 조그맣게 입을 오므리고

뿌리 쪽으로 가는 숨통을 가만히 연다.

새순이라고 줄기라고 천천히

좁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

길어지는 팔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돋아나는 가지들을 허공 쪽으로

흔들어 본다. 흐릿해지는 하늘 빈자리

연두에서 초록으로 난 길을 트이며

이파리가 돋고 꽃송이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을 위해

아직은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지 않기로 한다.

다람쥐가 어깨를 밟고 가는 것도

  몰래 뱃속에 숨겨둔 도토리 개수가

몇 개인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

하늘의 빈틈이 다 메워질 때쯤

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더는

빈 곳을 채워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

한 생애가 무르익었을 무렵

가지를 줄기를 밑동까지를 하나씩 비워가며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몇 권의 책 빈 술병을 올려둘 자리를 준비한다.

그리고는 어느 한순간 잿더미로 남는 

황홀한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는 아무것도 발음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 찰나, 나무는 비로소

한 그루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

 

나-無라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천천히 발음해 본다.

 

 

                    - 웹진 《님 Nim》 2023년 2월호

 

 

 

 

 

 

* 데네브들의 오십문오십답에서 다시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날까요,라는 질문에
나무로 태어나겠다는 데네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무의 삶은 멋있어 보였을까?

뿌리 깊은 나무가 된다는 건 그만큼의 노력과 애쓰는 마음이 있어야한다.

또 그만큼의 상채기도 나고 말이다.
오래된 나무를 보면 신의 경지와도 같고 존경스럽다.

 

보탑사의 주페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