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김경미]

JOOFEM 2024. 6. 8. 09:09

박수근 그림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비, 1995

 

 

 

 

 

 

* 꽃병의 물은 소리없이 물을 먹습니다.

이기적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물을 주는 이가 있으니 꽃이 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바퀴벌레를 보면 잡아죽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불교적이 되어 살리겠다구요?

이기적인 인간이라면 바퀴벌레를 죽여야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이기적인 것은 본능이기도 하고 삶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면 이기적이라고 보기 어렵겠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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