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 미래 [여세실]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였다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
었다 나는 무엇을 잡아두는 것에는 재능이 없고 외우던 단
어를 자꾸만 잊어버렸다
잎이 붉게 타들어간 올리브나무는 방을 정화하는 중이라
고 했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여전히 축축한, 죽어가면
서도 사람을 살리고 있는 나무를 나는 이제라고 불러본다
흙을 털어낸다 뿌리가 썩지 않았다면 다시 자랄 수 있을 거
라고
이제야 햇볕이 든다
생생해지며 미래가 되어가는
우리는 타고나길 농담과 습기를 싫어하고 그 사실을 잊어
보려 하지만
이미 건넜다 온 적 있지 뿌리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
날아본 적
양지를 찾아다녔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종 하나를 화분에 옮겨 심으면
야산의 어둠이 방 안에 넝쿨째 자라기도 한다는 걸
진녹색 잎의 뒷면이 바스라졌다
시든 가지에도 물을 주면 잎새가 돋았다
- 휴일에 하는 용서, 창비, 2023
* 다음달에 이사를 가려고 화분을 정리하는 중이다.
천장까지 닿는 커피나무 여섯그루중 한 그루는 밑동 십센치만 남기고 톱질을 했다.
그리고 역시나 천장에 닿는 노니를 똑같이 밑동 십센치만 남기고 톱질을 했다.
밑동 잘린 두 나무에서 며칠만에 새 싹이 마구마구 나오고 있다.
마치 '주인님 날 버리고 가면 안 되어유!' 라고 하는 것 같다.
할 수 없이 데리고 이사를 가야할 판이다.
오늘은 비파나무 세 그루중 두 그루를 밑동 십센치만 남기고 톱질을 했다.
그래도 새 싹이 나오면 '알았어유, 데리고 갈 거구만유!'라고 해야겠다.
물만 주면 미래가 쑥쑥 자란다.
같이 살다 같이 죽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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