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1997

허공에 매달린 사람 [이근화]

허공에 매달린 사람 [이근화]      창 너머의 것들을 외면할 것. 닫힌 창 앞에서 그의 일은 시작되었다. 온몸에 줄을 걸고 허공에 매달린 그는 정확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일정한 순서로 반복되는 동작들앞에서 유리는 순한 동물의 눈빛 같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먼 채 허공에 열려 있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나무에 매달린사과가 저 혼자 익어가듯이.   오늘 빌딩은 그를 매달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곡예가 창을 지웠다. 창밖의 풍경은 선명해질 것이다. 더러움과 먼지와 얼룩이 없다면 이 세계를 어떻게 실감할 것인지. 누구와 무엇과 눈을 맞추어야 하나. 그가 웃으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한층 한층 다정한 자세로 내려갔다. 그가 지운 얼룩은 내가 오래도록 서 있던 배경이었는데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시와 감상 2024.05.09

악착齷齪 [권혁웅]

악착齷齪 [권혁웅]      몰강이라, 파고가 제법 높은 강이라고 들었다 오래된 고성 하나쯤 모퉁이에세워둔 동유럽의 수로 아닌가 싶었다 몽골 기병들이 옥작옥작 몰려들 때 죄어드는 공포로 제 몸에 입 벌린 표정을 새겼다던가 동그랗게 오므린 순음은끝내 내향성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몰강은 따로 없고 몰강의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다 몰강스럽다(형) 모지락스럽고 악착스럽다 모지락은 그 강에 사는 조개의 일종, 슬픔을 오래 섭식하면 패류 독소를 품어 위험하다고 한다 끓는 물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수면에 얼비치는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모지락스럽다(형) 몰강스럽고 악착스럽다 그러니까 몰강의 조개는 그 강의 화신이기도 한 것, 어디에나 후렴처럼 악착이 붙어 있다 악착에 들러붙은 저 촘촘한 이빨들을 보라 입 벌린 ..

시와 감상 2024.05.05

리얼리티 [전욱진]

리얼리티 [전욱진]    시간을 여행한다영화에서 그랬다 앉아있는 나는 저렇게먼저 다녀온 다음에말해줄 수 없겠지 미래의 불행을 막으려고사랑하는 이의 생명을 지키려고눈에 보이는 선한 의지까지도여기 앉은 나한테는 없는 것 이미 일어난 일의 주변을 서성이며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정말 그래회상을 통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영화 속 사람들은 끝내불가능한 일들을 해내고가장 긴요한 역할을 수행해낸한 사람의 내레이션이 들리고 그렇게 이 모든 일은 과거가 되어간다화면 밖으로 영화가 길게 이어진다면그들은 이를 추억이라 부를지 모른다 이게 벌써 십년 전이구나같은 영화를 열번쯤 보는 나는플래시백이라는 기교를 부려본다 과거를 다시 돌보아현재를 돕고 싶지만 감정의 고조는 이제 없어눈 감고 누우면 그래도 잠이 왔다지키지 못한 것을 지..

시와 감상 2024.05.04

낮달 [이병률]

낮달 [이병률]     감 하나 서리한 날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덜컹하는 바람에 서리한 감이 앞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어느 정도는 뒷자리여서 또 사람들이 많이 타기도 해서 나를 신경쓰지 않겠다 싶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방이 기울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감을 봤는지 빈 내 옆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어르신이 더 신경을 쓰는 듯 했다  감도 여행을 하는 중인 거야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졸았다 버스가 도착하는 것 같아 눈을 뜨려는데 옆 옆 자리의 어르신이 손을 뻗어 나를 툭 치더니가리키는 게 있었으니   발밑에는 가만히 돌아와 멈춰 선  감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와 감상 2024.04.30

내면의 방 13도 [최돈선]

내면의 방 13도 [최돈선]    밖은 혹한이었다지난여름 질펀했던 색채의 번성이허물을 벗고 꽁꽁 얼어 있었다 명자꽃도 모란꽃도 숨어버린 바깥은 참혹했다나의 방 내면은 13도에 맞춰져처형의 고드름을 늘어뜨렸다살갗에 돋는 소름, 나는 의식이 더욱더 맑아졌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향해 불특정한 살의를 품게 되었다나는 그때만큼은 능동적이었다 저녁이면 겨울 척후병이 몰래 숨어들어냉기를 뿌렸다어차피 다시금 수동태가 될 수밖에 없는 생이어서인지문풍지가 밤새 울었다 때로는 아팠으며때로는 어디선가 목 쉰 만가를 듣기도 했다천장을 지나는 오색 깃발을 쳐다보는 건 환영이었다 아무 글도 써지지 않았다밥은 세끼 잘 먹었고 탈도 없었다유효기간이 훨씬 지난 음식들만이오직 냉장고 속에서 굳건했다 살날과 살아온 날이 뒤엉켜 목구멍이 메어..

시와 감상 2024.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