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2008

들고 가는 사람 [임지은]

들고 가는 사람 [임지은]      손에 물건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신에게아주 소중한 무엇이라도 되는 양 품에 안고 다니는 사람들이 바나나를 들고 가는 사람, 달걀 한 판을 들고 가는사람, 포도송이를 들고 가는 사람, 컵라면을 차곡차곡 쌓아서 들고 가는 사람, 들고 갈 것이 없어서 자기 자신을 들고 가는 사람까지   저 사람은 아침마다 바나나를 먹으며 출근 준비를 하겠지, 저 사람은 가족이 많아 달걀 한 판 정도는 금방 소진될거야, 저 사람은 포도를 참 좋아하는구나, 컵라면을 사 가는 이의 가스레인지는 깨끗하겠지, 자기 자신을 들고가는 사람은 끝내 자기 자신을 떨어뜨리겠구나   곧 한 사람이 다가와 제가 도와드릴까요? 함께 나눠들겠구나 집 앞에 다다라서는 도와 주셔서 감사해요 양손가득한 자신을..

시와 감상 2024.08.11

이직한 회사에는 텃새가 산다 [김광명]

이직한 회사에는 텃새가 산다 [김광명]    오착륙이라면 좋겠어 오늘의 도래지는 종이컵을 사랑의 날개라고 부르지유럽의 여름을 탁자 위에 늘어놓고, 풍선도 불어최대한 쓸모없게 따듯할수록 잘 녹는 기포달달함은 이때 등장하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부리로 농담을 저어버리지 눈이 마주칠 땐 어떤 얼굴이 어울릴까노르딕풍의 쓰다 남은 겨울과 털실 조끼와 통조림 산타기억 니은 기억 디귿 기억 리을 기억 다시 도돌이표자작나무의 자세로 시럽이 되지 휘청거리며 더 아래로 날아난 꿈을 잃어버린 나이부터 체인질링*이 취미였어 일어서지 못하면 팔짱 끼고 떠날 수 없지끝이 아니야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랑의 시작이지왼뺨이 부서진 철새는 잘 날 수 있을까잘 숨을 수 있을까깃털이 얼어붙은 겨울에 웃어도 될까 단맛이 부족한데 내일은 괜..

시와 감상 2024.08.05

적정 온도 [조온윤]

적정 온도 [조온윤]    주민센터에 왔어요창구에서 나를 응대해준 공무원은친절하지 않았지만무례하지도 않았습니다 대기표를 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내내그들의 첫인사와 끝인사는 엇비슷했습니다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서류를 건네고다음 번호를 부르죠 전문기구가 권장하는 겨울철 적정온도는 이십도겨울이면 이곳은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합니다 평온하다는 것, 지금 내 몸이 식어 있지도뜨겁지도 않다는 것손을 잡아도 느낄 수 없을 만큼투명한 체온이라는 것 다음 사람을 위해 내가 앉은 자리에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듯이휴대전화를 보며 걸어오는 이를 피해잠시 무해한 공기가 되어주듯이 오늘도 우리는 호의도 적의도 없이 안녕을 건넵니다 용무를 끝내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주민센터를 나왔습니다바깥은 공기가 찼지..

시와 감상 2024.07.25

시작 [박지혜]

시작 [박지혜]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햇빛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질경이가 좋겠다고 했다 투명한 유리병이 더 낫겠다고 했다 하얀 말을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그냥 노래를 부를까 노래를 부르느니 물로 들어가겠다며 발끝을 바라본다 몽환적이라는 말을 좋아하느냐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든 말에 속고 있다고 했다 차라리 일요일의 햇빛을 생각하겠다고 했다무심한 지렁이를 생각하겠다고 했다 가벼움에 대한얘기를 다시 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가볍고 빛나게떨어지고 있는 고독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텅 빈 모음만을 발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만 사는 섬에서 나오지 않았다 흐린 눈빛의 그들은 언덕을 그리거나 나무를 심거나 물고기를 불렀다 물빛을 닮은 눈빛은 항상 먼곳에 있었기 ..

시와 감상 2024.07.24

순진한 삶 [장수진]

순진한 삶 [장수진]      끝없이 내린 첫눈 속에 잠긴, 작은 짐승. 곁에는 수분이 바싹 마른 수국 한 묶음이 쓰러져 있다. 이 거리의 오래된 소설, 영화, 편지, 시는 끝났다. 너는 오늘도 사라진흑백영화 속에서 무언갈 찾는다. 익숙한 골목과 재킷, 슬로와 폭발.   끝에 파도가 쳤지.   주인공의 볼품없는 몸이 훤히 드러난 그 장면에서 너는 계급과 인종에 대해 잠시 생각했지만 결국엔 파도가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파도만 보게 되었다. 파 도 파 도미 도. 단순한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흥얼거리며 너는 파도를 이끌고 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짧은 팔, 굵은목, 뜻밖의 단정한 말들 소진된, 사람들.   비닐 장갑 위에 놓인 병든 아버지의 불알처럼 너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을 살아간다. 간판만 남은 영..

시와 감상 2024.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