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2008

곡비(哭婢) [문정희]

곡비(哭婢)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엄마는곡(哭)을 팔고 다니는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그네 울음에 꺼져버린 땅 밑으로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먹고 살았다.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먹으며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哭) 소리에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옥례엄마 머리 위에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알아야 하리. ​         ..

시와 감상 2024.06.14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김경미]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혼자 도망나옵니다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사는게 다 힘든 거야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아닙니다내게만, 내게만입니다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비, 1995      * 꽃병의 물은 소리없이 물을 먹습니다.이기적인 것은 당연..

시와 감상 2024.06.08

슬픔의 뒤축 [이대흠]

슬픔의 뒤축 [이대흠]      슬픔은 구두 같습니다 어떤 슬픔은 뒤축이 떨어질 듯 오래되어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참 오래 함께했던 슬픔입니다 너무 낡은 슬픔은 몸의 일부인 듯 붙어 있습니다슬픔은 진즉 나를 버리려 했을 것이지만 나는 슬픔이 없는게 두렵습니다 이미 있는 슬픔도 다하지 않았는데 새 슬픔을 장만합니다   새로운 슬픔은 나를 쓰라리게 합니다만 슬픔을 버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슬픔에 익숙해지려 합니다 남의 슬픔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지만 잠깐 빌릴 뿐입니다                 - 코끼리가 쏟아진다, 창비, 2022      *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있을 때가 화양연화이겠지요.너무 낡아서 신기조차 민망할 땐 자존심도 내려놔야 하지요.

시와 감상 2024.05.31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반항도 안 하고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처제, 하고 불렀다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원래가 느린 법이란다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눈을 감으렴잠시,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

시와 감상 2024.05.26

일없다 [오탁번]

일없다 [오탁번]    애련리 한치마을큰 느티나무 앞 폐교에는바람이 불고 낙엽이 날리고새소리만 들리는 적막뿐이었다오석烏石에 새긴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가번개치듯 내 눈에 들어왔다교실 세 칸에 작은 사택다 주저앉은 숙직실과좁은 운동장이옛동무처럼 낯익었다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을 살려'원서헌'遠西軒이라 이름 짓고해 뜨면 일어나고해 지면 잠을 잔다먼 서녘, 원서는종말이 아니라새날의 시초라고굳이 믿으면서스무 해 되도록이러구러 살고 있다 서울 친구들은낙향해서 괜히 고생하는 내가좀 그래보이겠지만수도가 터지고난방이 잘 안 돼도 일없다두더지가 잔디밭을 들쑤셔도사람보다멧돼지와 고라니가자주 와도 다 일없다                   - 속삭임, 오탁번 유고시집, 서정시학, 2024        * 오탁번시인과의 첫..

시와 감상 202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