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1997

러스크 [김미량]

러스크 [김미량]    잘라낸식빵 테두리를 살려야 한다고오전의 주방으로 뛰든 사람 버릴 것도 아닌데버려지리라는 앞서가는 마음의 테두리처럼 문 여는 소리에 놀라빵 터져버린비닐봉지를 뜯던 배고픔처럼 테두리가 전부인 우리를 나란히 펼쳐놓고 고민에 빠졌던 그날 홀짝은 게임이잖아네가 이기고 내가 지거나그 반대이거나 우리는 말다툼에 집중하지훌쩍은 습기 가득한 습관인지식빵의 슬픔인지 부드러울 때 먹어야 한다는 거사랑도 식탐도 시효가 있다는 거 오후의 간식을 위해바삭한 에어프라이어 온도를 예열한다시나몬 가루 톡톡 뿌린다 우리는 거절하기 힘든 버터 향을 맡았을 거야화해의 세계로 뛰어들어마주 보고 킁,킁,                   -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달아실, 2023       * 할아버지는 늘 할..

시와 감상 2024.07.11

지속 가능한 이야기를 찾아서 [주민현]

지속 가능한 이야기를 찾아서 [주민현]    빛나는 드레스와 턱시도 없이도우리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선언 지속 가능한 행복을 찾아서 구두를 벗어던지고 턱시도를 젖히고춤을 추며 입장하는 이들이 있네* 흰 지점토를 뭉치면 언제나이상한 조형물 같아 보이듯이 미래의 이야기에는아직 빚어지지 않은 인간의 형상이 있다 사랑은 튼 살조차 몸에 난 창문블라인드 사이로 내리쬐는 볕이나 물결처럼 보이게 하는 드물게 아름다운 세계여서우리는 입장과 퇴장을 반복하겠지 서로를 터널처럼, 실수로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만들어버린 재단사에게는꿈과 함께 발생하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수집하는 재주가 있고 이례적인 폭염과 가뭄, 타오르는 공장넘치는 강물과 흘러내리는 산사태에도 우리가 모두 살아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밤이면 드레스의 ..

시와 감상 2024.07.06

질문들 -병맛을 위한 찬가 [유현아]

질문들 -병맛을 위한 찬가 [유현아]    손을 움켜쥐고 병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려 애썼지오로라가 날아다니는 병 속 세계를 펼치고 싶었지깔깔거리는 웃음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지너는 병맛 스타일로 세계를 제패하는 거지닌나난나 닌나난나 자장가를 들려주면서 말이야 병맛이라는 단어가 처음 태어났을 때너는 떠다니는 병맛을 알기 위해 노래를 마시기 시작했지손을 집어넣을 때 물컹거리는 단어들을 주워가면서 말이야 병맛엔 어떤 힘이 있는 거니왜곡된 청구서 속에서 너는 있는 힘을 다해마셨던 노래를 화염병처럼 투척하는 거지그러면 파바바박 노래가 터지는 거지붉은 마녀가 움켜쥔 병이 심드렁해질 때까지 말이야 그런 구린 스타일을 병 속에 넣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병맛엔 너의 거룩함을 방해할 맹탕이 숨어 있는 거지혀를 잃어버린 맛에 ..

시와 감상 2024.06.29

나무의 발성 [박완호]

나무의 발성 [박완호]    씨앗이라고, 조그맣게 입을 오므리고뿌리 쪽으로 가는 숨통을 가만히 연다.새순이라고 줄기라고 천천히좁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길어지는 팔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돋아나는 가지들을 허공 쪽으로흔들어 본다. 흐릿해지는 하늘 빈자리연두에서 초록으로 난 길을 트이며이파리가 돋고 꽃송이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을 위해아직은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지 않기로 한다.다람쥐가 어깨를 밟고 가는 것도  몰래 뱃속에 숨겨둔 도토리 개수가몇 개인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하늘의 빈틈이 다 메워질 때쯤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더는빈 곳을 채워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한 생애가 무르익었을 무렵가지를 줄기를 밑동까지를 하나씩 비워가며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아무나 앉을 수 ..

시와 감상 2024.06.27

곡비(哭婢) [문정희]

곡비(哭婢)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엄마는곡(哭)을 팔고 다니는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그네 울음에 꺼져버린 땅 밑으로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먹고 살았다.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먹으며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哭) 소리에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옥례엄마 머리 위에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알아야 하리. ​         ..

시와 감상 2024.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