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275

그해 오늘 [고영민]

그해 오늘 [고영민]    오랜만에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체한 듯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여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 먹이고도산공원을 걸었다그해 오늘 저녁 그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깨어나지 못했다 그해 오늘나는 또 그녀를 만나 점심을 먹고커피를 손에 들고 도산공원을 걷는다팔을 벌려 오늘의 냄새를 껴안는다 납골당에 다녀온 조카가 단톡방에사진을 올렸다― 1주기야, 크고 뚱뚱한 엄마가     어떻게 저 작은 항아리 속에 들어간 걸까 ㅎ 동의 없이 무언가를 빼앗긴사람들을 생각한다 그해 오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다갈라파고스땅거북의 마지막 개체인외로운 조지(Lonesome George)가 죽었고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수영으로대한해협을 건넜다 그녀를 만난다. 그해 오늘그 거리에서 아직 찾아오지 않은 시간의일이지만    ..

시와 감상 10:47:32

황금빛 가을에 [고영민]

황금빛 가을에 [고영민]    이젠 단풍나무가 단풍나무로만 보인다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도그냥 은행나무로만 보인다예전엔 물든 나무에게서의미심장한 시상(詩想)도 보이곤 했는데이젠 그저 서 있는 나무로만 보인다그동안 나는 너무 속아왔다다 떠나버린 저 나무 주위를철없이 나 혼자만 맴돌고 있었다정작 상대는 기억도 못하는 일에혼자 미안해하고 있었다바닥을 쓸던 미화원이 빗자루를 들어 가지에 매달린 노란 은행잎을왜 털어내는지 이젠 알 것 같다그는 낙엽을 커다란 자루에 담고길가 여기저기에 무덤덤 세워둘 뿐이다그새 나는 너무 삭막해졌나그렇다면 오늘은 양손 가득 은행잎을 담아머리 위에 뿌리며 부러낙엽 샤워라도 즐겨볼까두고두고 꺼내 볼 인생 숏이라도 한 컷멋지게 찍어볼까                    - 햇빛 두 개 더, ..

시와 감상 2024.11.01

그날 저녁의 생각 [조용미]

그날 저녁의 생각 [조용미]      내 손을 주머니로 가져갔던 그 저녁은 살아 있는 듯몹시 추웠다 물건처럼 나는 한쪽 손을 전달했다 낯선 골목을 익숙한 듯 바라본다   당신은 나의 괴로움을 모른다 당신은 나의 정처 없음을 모른다  당신은 이 세계가 곧 무너질 것을 모른다   우리는 잠시 코트 주머니 속의 공간을 절반씩 나누어가졌다 당신이 그 순간을 기억해낼 수도 있다는 희미한가능성을 나는 염두에 둔다   우리는 아주 먼 오래전에 한 번쯤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신이 하게 되려는 그 순간 손은 주머니에서문득 빠져나왔다   그날 밤은 몹시 추웠던가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다나온 손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단정하게 손목 아래가만 놓여 있다   당신이 하려던 생각처럼 우리는 죽기 전에 한 번쯤만났을지도..

시와 감상 2024.10.27

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자주 소멸을 꿈꾸며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고요한 어둠 속에서 점차생각조차 희박해지고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 이상한 야유회, 창비, 2010     * 이사를 할 때마다 오래된 기억들을 몽땅 들고 다녔다.농촌봉사활동, 적십자 써클활동, 일기장, 사진 등등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삼십년 넘게 들고 다녔..

시와 감상 2024.10.23

어떤 흙이 되려나 [이병진]

어떤 흙이 되려나 [이병진]​ ​​​흙이라고 다 같은 흙이 아닐진대흙의 성질이 도자기의 질감을 바꿀진대​딱딱해서도 물러도 안 되고입자가 거칠거나 색이 도드라져도 안 되고1300℃의 불을 무던하게 견뎌야 하고가마의 시커먼 손장난에도 진득해야 한다혹여 귓불에 뜨거운 바람이 들어오더라도몸을 비틀거나 마음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그래야 매끈한 세상을 만나고나무처럼 버티는 힘이 생기고한낱 질그릇과는 결이 달라질 터​저 흙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것​풍파에 뒤틀려 불순한 나는어느 화장터에서 몸을 뜨겁게 굽더라도반듯한 자기磁器 하나 못 얻을 나는​죽어 어느 골짜기에서 어떤 흙이 되려나​​​              - 애지 2024년 여름호      * 민들레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다가 자기의 뜻과는 다른 곳에 ..

시와 감상 202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