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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방 13도 [최돈선]

내면의 방 13도 [최돈선]    밖은 혹한이었다지난여름 질펀했던 색채의 번성이허물을 벗고 꽁꽁 얼어 있었다 명자꽃도 모란꽃도 숨어버린 바깥은 참혹했다나의 방 내면은 13도에 맞춰져처형의 고드름을 늘어뜨렸다살갗에 돋는 소름, 나는 의식이 더욱더 맑아졌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향해 불특정한 살의를 품게 되었다나는 그때만큼은 능동적이었다 저녁이면 겨울 척후병이 몰래 숨어들어냉기를 뿌렸다어차피 다시금 수동태가 될 수밖에 없는 생이어서인지문풍지가 밤새 울었다 때로는 아팠으며때로는 어디선가 목 쉰 만가를 듣기도 했다천장을 지나는 오색 깃발을 쳐다보는 건 환영이었다 아무 글도 써지지 않았다밥은 세끼 잘 먹었고 탈도 없었다유효기간이 훨씬 지난 음식들만이오직 냉장고 속에서 굳건했다 살날과 살아온 날이 뒤엉켜 목구멍이 메어..

시와 감상 2024.04.27

풀밭나라에서 안부를 [이기철]

풀밭나라에서 안부를 [이기철] 그대 한 복판에 닿고 싶어서 내 발은 오늘도 그대 그늘 백 리 밖을 혼자 서 성이네 내 몸 어딘가에 숨겨둔 마음은 저 혼자 두근거려 제 무게를 간신히 견디네 우리가 풀밭이라고 말하는 초록나라의 자디잔 이야기는 사람의 귀로는 듣 지 못하네 햇살 아래 햇살 아래 흐르는 냇물, 오라는 당부 없어도 내일이 온다고 혼자 나선 십리 펄, 내게 온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고 걸어가는 등뒤엔 한때 그리움이라고 말했던 사람의 이름이 쌓이네 흔들려 땅의 중심인 풀밭 나라에 오늘도 햇볕은 단품 식탁을 차리네 반짝임이 언어인 초록 위에 노는 햇볕을 잡으려다 두 손만 데네 - 시와 세계 2024 봄호 * 모처럼 부산에서 정모를 하였으나 날씨가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사직구장..

시와 감상 2024.04.21

하루 종일 궁금한 양초 [강우근]

하루 종일 궁금한 양초 [강우근] 하나의 불이 꺼질 때 나의 영혼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궁 금해 내가 희미해질 때 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은 전부 검게 물들어가는지 내가 사라질 때 또다른 빛을 보는 아이들의 표정은 얼마 나 생생할까 어디선가 달리고 있을 아이들은 모래알처럼 빛이 날까, 초원의 풀처럼 자꾸만 솟아날까 용기가 없는 사람의 용기가 정말로 궁금해 잠들기 싫은 날에 나를 오래도록 켜놓은 사람의 다음 날이 힘을 내려고 밥을 푹푹 떠먹는 사람의 아침 인사가 궁금해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이 하얀 연기는 내가 말하는 방식일 까, 당신이 말하는 방식일까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나를 자꾸만 피운다 나는 당신에게 몇분의 기억이 될 수 있을지 당신이 읽는 책의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 당신이 울면서 했던 기..

시와 감상 2024.04.19

흰 냄새가 나는 식탁 [강성은]

흰 냄새가 나는 식탁 [강성은]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모두 눈을 감는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아이는 궁금하다 눈을 떠도 음식은 보 이지 않는다 음식은 하얀 천으로 덮여 있다 하얀 천 아래 무엇이 있 을까 하나님이 주신 것 살며시 손 내밀어 식탁보를 들추려 할 때 거 센 손이 아이의 손을 후려친다 기도는 산산조각 난다 사방에서 무서 운 침묵이 아이를 노려본다 식사는 시작하기도 전에 중단된다 희고 고요한 천 아래 보이지 않는 오늘의 양식은 오늘도 아이에게 오지 않는다 모두가 눈을 감고 있다 - 현대문학 2024년 3월호 * 기분탓일까. 이 시를 읽으니 하얀 찔레꽃이 떠오른다. 보릿고개란 말을 알고 자란 세대는 하얀 찔레꽃을 따먹고 자랐을 테다. 하얀 꽃을 따먹지 않아도 눈으로 ..

시와 감상 2024.04.13

살구나무 비행기 [고민형]

살구나무 비행기 [고민형] 살구나무 비행기를 탔다 누군가 이거 비행기 맞지요 물 으면 승무원들은 그럼요 물론이죠 시원하게 대답해주었 다 비행기가 급락했다 잠든 아이들이 붕 떠서 공중을 유영 했다 天使 같았다 살구 주스에 소주를 넣어 마신 아저씨가 군가를 불렀다 창문 밖으로 비행기 날개가 보였는데 불타 고 있었다 살구나무가 잘 타고 있었다 승무원들이 위험할 수 있으니 모두 앉으라고 했다 한구석에는 승객 둘이 머 리카락을 잡고 뒹굴었다 승무원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나하고 기장과 부기장도 복도로 나왔다 엔진 이 불타고 있는데 괜찮나요? 그럼요 살구나무는 금방 안 타요 창밖으로 노을이 진다 그 불빛이 감은 눈을 붉게 비 춘다 사람들이 카운트 다운을 외친다 비행기 날개가 떨어 져 나간다 불덩이가 되..

시와 감상 2024.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