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아톤'의 장면들
우리 동네 목사님[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대학시절[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왔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 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엄마 걱정[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예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동아일보에 난 기사.
"대한스트레스학회가 '생애 주기별 스트레스'라는 주제로 춘계학술대회를 한다는 거다.
내용인즉슨 유년기에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 하는 시기로 부모에게서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할까 스트레스를 받고,
아동기에는 경쟁에서 뒤질까 보아
청년기에는 부모나 어른과 말이 통할지, 원하는 직업을 얻을지 정체성확립때문에
성인초기에는 좋은 배우자를 못만날까보아
성인중기에는 자녀양육과 직장생활이 잘 될까 싶어서
노년기에는 살아온 인생에 만족할 수 있나 싶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다."
한마디로 모두가 [유기불안]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얘기이다.
유기불안으로 인해 우울하고 불안하고 열등감에 빠지며 일탈 혹은 비행, 그리고 좌절하며
고립감을 느끼거나 공허하고 초조해 한다.
이 스트레스는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심리적인 외상이 될 수도 있고 성숙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시인 기형도는 유년시절부터 유기불안에 시달렸던 것 같다.
위 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가 유기불안에 기저한 내용들이며 심한 트라우마가 표출되어 있다.
[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소년은 대학졸업을 하면서 외톨이가 되어 세상에 나가는 게 두렵고 세상에서 버림받을까 두려워 하였다. 동네 목사님을 투사하여 버림받고 쓸쓸해진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결국 시인 기형도는 유기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극장의 어둠 속에서 혼자 외톨이가 되어 죽었다.
어둡고 무서운 세상 가운데 혼자 내버려진 그가 선택한 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이 유기불안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직장에서 무능력하다고 잘리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세대차이 난다고 부모를 무시하고 내다 버리진 않을까,
심지어는 하나님이 순종치 않는다고 나를 저만치 밀어내시지는 않을까,
온통 스트레스 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럴 땐 버림받는 거 그까이꺼!하면서 이겨내고 떨쳐버려야 하리라.
혹은 버림받기 전에 내가 버리는 건 어떤가.
아니지, 버림받지 않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면 되잖아.
강은교의' 사랑법'을 소리내어 읽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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