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흰 꽃은 흰 손으로 따라[이기철]

JOOFEM 2010. 4. 18. 18:29

 

 

 

 

 

 

 

흰 꽃은 흰 손으로 따라[이기철]

 

 

 

 

오늘 만진 꽃에 내 손톱이 물들었다

 

개울물에 손을 씻고

흰 꽃은 흰 손으로 따라

 

세상을 만지던 손으로 어찌

흰 꽃을 딸 수 있나

흰 꽃 속에 숨어있는 멀고 먼 길을

겨울이 내어놓은 추운 양지를

그만 내려놓고 싶었던 둥근 나이테를

세상을 밟던 발로 어찌

흰 꽃이 그늘을 밟을 수 있나

 

저 흰 꽃으로 내 생의 서른 장을

기록해놓았으면 좋겠다

꽃을 밀어올린 물 이름 햇빛 이름을

기록해놓았으면 좋겠다

거기까지 닿지 못해 글썽이며 돌아선

초록이름을 기록해놓았으면 좋겠다

꽃나무가 다른 꽃송이를 내어놓는 날

지는 꽃 한 송이를 받아드는 손이 아름답다

 

내 가까운 사람아

오늘은 모시수건에 손을 닦고

흰 꽃은 흰 손에 받아두어라

 

 

 

 

 

 

 

* 어제는 북일고등학교 교정에 하나 가득 핀 벚꽃을 만났습니다.

오늘은 곰탕집 마당에 핀 하얀 민들레와 하얀 제비꽃을 만났습니다.

세상은 온통 노란 민들레와 보라색 제비꽃이 천지인데 드문드문 흰 꽃이 눈에 띄었습니다.

전에는 꽃만 보면 베란다고 거실이고 화분에 담았었지만 요즘은 흰 손이 아니어서인지

그냥 들판에 자연스럽게 핀 꽃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삽니다.

그래도 아쉬워서 데이지꽃 화분을 베란다에 놓고 대화를 하는 중입니다.

닦아도 하얘지지는 않겠지만 수돗물에 손 닦고 데이지 화분에 손을 흔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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