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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시를 읽는다 [장수진]

악마는 시를 읽는다 [장수진]    악마야나랑 놀자우리는 무직이니까 다가오는 아침을 죽여줘푸른 공원을 잿빛으로 만들어줘비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질리고 질릴 때까지맑은 날이 올 거라는 믿음과 기대가마음을 조금씩 파먹어서괴롭고띨띨해지고조바심이 나서 죽겠을 때까지 뉴스나 라디오를 틀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무섭고 좋고쫄쫄 굶어 온몸의 모든 것이다 빠져나가졸도해버릴 때까지 생의 기쁨과 행복이 단순히 비 때문에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어 중대하고 심오한 비극이있을 리 없잖아             - 순진한 삶, 문학과지성사, 2024       * 절을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생의 기쁨을 찾아내고 누리려고 가는 것일까.괴롭고 힘들고 그래서 번뇌하며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어서 가는 것일 게다.행복이 완전히 무..

시와 감상 2024.03.15

시니* [채인숙]

시니* [채인숙] 잊어버렸지 당신도 이 바다에 온 적이 있었지만 빠랑뜨리띠스 검은 해변에서 나란히 앉아 마차를 타던 우리는 다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으면 어떤 인사를 해야 하는지 헛된 추억을 불러오는 석양이 절벽을 적시고 놀란 당신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겁먹은 나는 입을 열지 못했네 서로에게 덜컥 잊혀진 거지 귀 옆으로 기차가 지나던 우리의 작은 방이 사라진 것처럼 말하지 못한 것은 말할 수 없었던 것 뜨거운 국물 같은 것을 먹으면 당신이 생각났다고 토라자 문양이 새겨진 티크 테이블에 앉아 그때 못한 말을 여태 삼키고 있네 * '여기'라는 뜻의 인도네시아어. -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 2023 * 내가 사는 여기가 고향이다. 내 발을 디디고 호흡하는 여기가 나의 세상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이십육년을 ..

시와 감상 2024.03.12

아주 슬픈 모리츠 씨 [주민현]

아주 슬픈 모리츠 씨 [주민현] 아주 슬픈 모리츠씨는 일생에 두번 넘어졌다; 대입 시험에서 한번 고객사 미팅에서 아주 큰 재채기를 해서 또 한번 아주 슬픈 모리츠 씨 양말없이 구두를 신은 해가 뜬 날 우산을 든 그런 슬픈 모리츠 씨 삶과 죽음은 가고 오는 것 모리츠 씨의 할아버지가 가고 조카가 가고 무지개의 빛이 문득 빛나는 머리칼 같다 개를 데려온 사람은 해변의 개를 찍고 아이가 있는 사람은 해변에서 노는 아이를 찍고 혼자 온 모리츠 씨는 해변에 가만히 발자국을 찍는다 그런 모리츠 씨와 나는 메리 에번스*와 함께 저물어가는 해를 본다 시간을 물쓰듯 하던 시절이 있었다** 꿈속에서는 웃었던 기억이 없다 멈추어 있는 게 좋았다 조금 투박하게 겨울이 오고 있어, 말하면 시작되는 음악 눈이 오는 소리로 시작되..

시와 감상 2024.03.09

육상선수 [박세미]

육상선수 [박세미] 선수는 땅을 짚는다 선수는 신호탄을 기다린다 태어난 지 1년도 안 되어 걸음을 떼고 몇 개월 뒤엔 뒤 꿈치를 이용해 걸을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잘 걷고 잘 뛰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세상사 의 모든 화근이 아닐까 선수는 생각했다 선수는 걷고 달 리는 일 너머의 것들은 하고 싶지 않다 결승선 너머에 아 무것도 없듯이 뛴다 오로지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에만 집중한다 지면에 붙어있는 순간보다 공중에 떠 있는 순간이 더 많다 스타트와 라스트스퍼트를 훈련한다 팔다리를 효율적으로 가동한다 최대한의 속도를 익힌다 선수는 기록을 세운다 기록을 깨고 또다시 기록을 세운다 달리기 위해 달린다 그러다 선수는 누군가 손뼉을 치거나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풍선이 터 지거나 숟가락을 내려..

시와 감상 2024.03.01

나는 어떻게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김이강]

나는 어떻게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김이강] 애인이 손을 따 주었습니다 체했거든요 아름답고 따뜻한 겨울밤이었습니다 애인은 바늘로 찔렀습니다 엄지손가락에서 피가 날 만도 한데 애인과 나는 깔깔깔 웃었습니다 엄지손가락에 송송송 구멍만이 남았거든요 아름답고 따뜻한 겨울밤 우리가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요 나는 배가 아프고 애인은 나 대신 바늘을 먹고 있네요 우리의 시간이 수천 일째 바늘을 먹고 아름다운 폭포수와 바위를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 공원으로 가게 될까요 아름답고 따뜻한 폭포수의 밤 * 밴드 드위들덤의 곡 제목을 빌림 - 타이피스트, 민음사, 2018 * 체했을 때 엄지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피를 내는 민간요법도 있고 백년이 넘은 부채표 활명수를 마시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무식하게 그냥 ..

시와 감상 2024.02.24

가방의 존재 [주민현]

가방의 존재 [주민현] 가방을 잃어버리고 어제와는 내가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들어 명함은 비에 젖어 부드럽게 찢어지겠지 간밤의 메모 뭉치는 자동차 바퀴 아래를 구르고 있을 거야 카드사의 전산망에서 사라진 내가 나인지 모르게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국수를 먹는다 집에서 개는 나를 몰라보고 꼬리를 치며 멍멍 짖는다 개집에는 내가 잃어버린 머리끈과 볼펜 뚜껑, 고지서 겉장이 찢어진 채 있다 주워, 네 거잖아 어떤 것들은 사라진 때부터 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해 작아진 도트무늬 블라우스 가볍게 날아가고 풍선 같은 고무공 같은 꿈을 불어넣어줬던 선생님들도 함께 가고 이제는 인생의 고전이 되지 못하는 책들에 불이 붙어 날아가고 책상은 어쩐지 내가 모르는 내가 죽은 듯 낯설다 버려진 코카콜라 병을 모두 모아..

시와 감상 2024.02.21

맨홀 [정재율]

맨홀 [정재율] 소란스럽다​ 세수를 마치고 나왔는데 수건에서 유칼립투스 냄새가 난다 창밖엔 아이들이 모여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자세히 보니 개미굴을 보고 있다 큰 개미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아이들 사이로 지나간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줄 몰라 제자리에 멈춰 서 있다 먹을 것을 주고 싶은데 개미는 너무 작고 차는 너무 위험하게 달린다 조용히 해야 해 숨을 죽인 채로 한 명이 말하자 작은 목소리로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 개미가 구멍에 들어갈 때까지 아이들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다 아이들은 책가방을 들어 조심 조심 이동하고 코너를 돌 때까지 계속해서 이쪽을 뒤돌아본다 아이들이 다 사라지면 어느새 거리는 조용해지고 밤이 되자 밖에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

시와 감상 2024.02.19

불시착 [변혜지]

불시착 [변혜지] 우리가 인중에 흰 얼룩을 묻히고 다니던 아이였을 때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은 우리 것이었다. 줄에 묶은 통나 무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주어진 모든 시간 을 그 길목에 묶어두었다. 백까지 세야 돼. 오래된 장승을 중심으로 아이들이 달려나가면, 술래는 시위에 메겨진 화살 같았다. 어떤 날에는 다른 곳으로 튕 겨 나가기도 했다. 과실수들이 붉은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주고, 초원의 풀들이 마련해준 잠자리에 누우면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했다. 다 함께 장승 놀이를 하자. 부리부리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지키자. 잠시도 서로를 떠나지 말자. 코를 훌쩍거리며 나는 모두에게 엄숙하게 제안했고 그곳에서 술래를 놓고 떠난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오 래오래 행복하게 지내기도 ..

시와 감상 2024.02.12

다음 생의 운세 [채인숙]

다음 생의 운세 [채인숙] 다시 태어나면 살던 마을을 떠나지 않으리 지붕 낮은 집에서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 다리고 겨울을 지나리 뒷산에서 주워 온 나무 둥치로 의자를 만들어 눈이 멀도록 저녁놀을 보리 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앉아 먼 나라의 당신이 보내온 엽서를 읽으리 내 몸을 움직여 돈을 벌고 아이들을 낳아 늦가을 볕 같은 곁을 내어주리 사랑에 실패하고 우는 아이 옆에서 함께 훌쩍이며 눈 물을 훔치리 누군가 떠났고 누군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천변에서 들 으리 혼자 기다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 내 어린 날의 바닷가 마을에 다시 태어난다면 수심을 헤엄쳐 바위 틈에 낀 성게를 줍는 해녀가 되리 봄 쑥을 캐고 생미역을 잘라 먹으며 웃는 날이 많으리 쉬는 날에는 문구점에 들러 색 볼펜을 고르고..

시와 감상 2024.02.11

코러스맨 [김중일]

코러스맨 [김중일] 바람이 나뭇잎과 매일 박수 치며 부르는 노래. 새로부터 내 이름 석자가 불린 이후, 나는 그 노래의 사이사이 코러 스처럼 떠돌았다. 지휘하던 커다란 손이 내 목덜미를 한손 에 거머쥐고 하늘로 한없이 끌고 올라가더니 돌연 사라져 버렸다. 나는 빗방울처럼 당신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누가 돌연 박수를 단 한번 쫙 치고 사라졌다. 한순간 화끈 하게 달라붙었던 두 손이 떨어지듯, 아침마다 하늘과 땅이 둘로 떨어져나갔다. 드센 빗줄기는 하나로 달라붙어 있던 하늘과 땅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뜯어내는 사이 드러난 아 교풀처럼 공중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다. 산천초목은 처 음에 하늘과 땅이 단단히 달라붙어 있었다는 증거. 땅에서 하늘이 공중으로 뜯겨나가며 생긴 풍경이란 잔해들. 우리가 왜 틈만 나면 ..

시와 감상 2024.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