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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비(哭婢) [문정희]

곡비(哭婢)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엄마는곡(哭)을 팔고 다니는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그네 울음에 꺼져버린 땅 밑으로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먹고 살았다.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먹으며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哭) 소리에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옥례엄마 머리 위에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알아야 하리. ​         ..

시와 감상 2024.06.14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김경미]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혼자 도망나옵니다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사는게 다 힘든 거야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아닙니다내게만, 내게만입니다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비, 1995      * 꽃병의 물은 소리없이 물을 먹습니다.이기적인 것은 당연..

시와 감상 2024.06.08

슬픔의 뒤축 [이대흠]

슬픔의 뒤축 [이대흠]      슬픔은 구두 같습니다 어떤 슬픔은 뒤축이 떨어질 듯 오래되어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참 오래 함께했던 슬픔입니다 너무 낡은 슬픔은 몸의 일부인 듯 붙어 있습니다슬픔은 진즉 나를 버리려 했을 것이지만 나는 슬픔이 없는게 두렵습니다 이미 있는 슬픔도 다하지 않았는데 새 슬픔을 장만합니다   새로운 슬픔은 나를 쓰라리게 합니다만 슬픔을 버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슬픔에 익숙해지려 합니다 남의 슬픔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지만 잠깐 빌릴 뿐입니다                 - 코끼리가 쏟아진다, 창비, 2022      *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있을 때가 화양연화이겠지요.너무 낡아서 신기조차 민망할 땐 자존심도 내려놔야 하지요.

시와 감상 2024.05.31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반항도 안 하고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처제, 하고 불렀다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원래가 느린 법이란다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눈을 감으렴잠시,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

시와 감상 2024.05.26

일없다 [오탁번]

일없다 [오탁번]    애련리 한치마을큰 느티나무 앞 폐교에는바람이 불고 낙엽이 날리고새소리만 들리는 적막뿐이었다오석烏石에 새긴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가번개치듯 내 눈에 들어왔다교실 세 칸에 작은 사택다 주저앉은 숙직실과좁은 운동장이옛동무처럼 낯익었다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을 살려'원서헌'遠西軒이라 이름 짓고해 뜨면 일어나고해 지면 잠을 잔다먼 서녘, 원서는종말이 아니라새날의 시초라고굳이 믿으면서스무 해 되도록이러구러 살고 있다 서울 친구들은낙향해서 괜히 고생하는 내가좀 그래보이겠지만수도가 터지고난방이 잘 안 돼도 일없다두더지가 잔디밭을 들쑤셔도사람보다멧돼지와 고라니가자주 와도 다 일없다                   - 속삭임, 오탁번 유고시집, 서정시학, 2024        * 오탁번시인과의 첫..

시와 감상 2024.05.21

나비를 보는 고통 [박찬일]

나비를 보는 고통 [박찬일]    *혼자 날아다니다, 흙에서 흙에서 뒹굴다, 가는 나비여. 날개가 아니라 몸뚱어리라는 것을.그가 날갤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것을.내 진작 알았더라면 날개가 몸뚱어리에 붙은 어떤 단어라는 거.내 진작 알았더라면 몸뚱어리가 가니까 날개가 따라 접히는 것을.내 진작 알았더라면 혼자 다니다 흙에 뒹굴다 흙에 뒹굴다 가는 나비에,나비 운명에,내 가까이 가지 않았을 텐데. * 하늘하늘 날아다니다가, 하늘―하늘을 궁금해 하다가,평생 다 보낸 자 하늘 아래 것 다 놓친 자 물구덩이에 빠졌다,물구덩이에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나비의 원수가 날개―나비의 원수가 하늘  *검은 제비나비가 무릎 아래에서 펄럭거리고 다니는 것은벌레를 잡숫기 위해?천만에! 땅에 대고 싶어서다땅에 기대어저 무한 낭떠러..

시와 감상 2024.05.18

허공에 매달린 사람 [이근화]

허공에 매달린 사람 [이근화]      창 너머의 것들을 외면할 것. 닫힌 창 앞에서 그의 일은 시작되었다. 온몸에 줄을 걸고 허공에 매달린 그는 정확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일정한 순서로 반복되는 동작들앞에서 유리는 순한 동물의 눈빛 같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먼 채 허공에 열려 있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나무에 매달린사과가 저 혼자 익어가듯이.   오늘 빌딩은 그를 매달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곡예가 창을 지웠다. 창밖의 풍경은 선명해질 것이다. 더러움과 먼지와 얼룩이 없다면 이 세계를 어떻게 실감할 것인지. 누구와 무엇과 눈을 맞추어야 하나. 그가 웃으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한층 한층 다정한 자세로 내려갔다. 그가 지운 얼룩은 내가 오래도록 서 있던 배경이었는데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시와 감상 2024.05.09

악착齷齪 [권혁웅]

악착齷齪 [권혁웅]      몰강이라, 파고가 제법 높은 강이라고 들었다 오래된 고성 하나쯤 모퉁이에세워둔 동유럽의 수로 아닌가 싶었다 몽골 기병들이 옥작옥작 몰려들 때 죄어드는 공포로 제 몸에 입 벌린 표정을 새겼다던가 동그랗게 오므린 순음은끝내 내향성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몰강은 따로 없고 몰강의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다 몰강스럽다(형) 모지락스럽고 악착스럽다 모지락은 그 강에 사는 조개의 일종, 슬픔을 오래 섭식하면 패류 독소를 품어 위험하다고 한다 끓는 물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수면에 얼비치는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모지락스럽다(형) 몰강스럽고 악착스럽다 그러니까 몰강의 조개는 그 강의 화신이기도 한 것, 어디에나 후렴처럼 악착이 붙어 있다 악착에 들러붙은 저 촘촘한 이빨들을 보라 입 벌린 ..

시와 감상 2024.05.05

리얼리티 [전욱진]

리얼리티 [전욱진]    시간을 여행한다영화에서 그랬다 앉아있는 나는 저렇게먼저 다녀온 다음에말해줄 수 없겠지 미래의 불행을 막으려고사랑하는 이의 생명을 지키려고눈에 보이는 선한 의지까지도여기 앉은 나한테는 없는 것 이미 일어난 일의 주변을 서성이며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정말 그래회상을 통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영화 속 사람들은 끝내불가능한 일들을 해내고가장 긴요한 역할을 수행해낸한 사람의 내레이션이 들리고 그렇게 이 모든 일은 과거가 되어간다화면 밖으로 영화가 길게 이어진다면그들은 이를 추억이라 부를지 모른다 이게 벌써 십년 전이구나같은 영화를 열번쯤 보는 나는플래시백이라는 기교를 부려본다 과거를 다시 돌보아현재를 돕고 싶지만 감정의 고조는 이제 없어눈 감고 누우면 그래도 잠이 왔다지키지 못한 것을 지..

시와 감상 2024.05.04

낮달 [이병률]

낮달 [이병률]     감 하나 서리한 날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덜컹하는 바람에 서리한 감이 앞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어느 정도는 뒷자리여서 또 사람들이 많이 타기도 해서 나를 신경쓰지 않겠다 싶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방이 기울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감을 봤는지 빈 내 옆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어르신이 더 신경을 쓰는 듯 했다  감도 여행을 하는 중인 거야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졸았다 버스가 도착하는 것 같아 눈을 뜨려는데 옆 옆 자리의 어르신이 손을 뻗어 나를 툭 치더니가리키는 게 있었으니   발밑에는 가만히 돌아와 멈춰 선  감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와 감상 2024.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