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2008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황유원]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황유원]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그 풀이 뚝, 뚝끊기는 소리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치던 피아니스트의 굽은 오른 손은불어오는 바람에 서서히 펴져 나무처럼 자라오른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이제는 한가한 게 어떤 건지도 잘모르게 된 나는저 양들을 보며 비로소 무언갈 깨달아간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연주는 얼마나 놀라운가풀 한포기 없는 방을 풀밭으로 만들어 놓고천장을 본 적 없는 하늘빛으로 물들이는 이 연주는,머릿속을 점령한 채 계속 날뛰는 무가치한 생각들을스르르 잠들게 하는 이 연주는! 음악은 연주와 더불어 잠이 들고양들도 이젠 다들 풀밭에 무릎 꿇은 채 그만잠이 들어풀 뜯는 그 모습 더는 보여주지 않지만나는 이제 한동안 음악 없이도 양들이..

시와 감상 2024.10.17

동네 서점에서 [김상미]

동네 서점에서 [김상미]    ―할아버지, 시집 한 권 추천해주세요.  ―어떤 시집?  ―제목 근사한 것으로요.  ―제목 근사한 시집이라...... 이게 우리집에 있는 시집의전부인데...... 아가씨가 직접 골라보게나.  ―그러죠. 시집들이 참 예쁘네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누구도 기억하지않는 역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왜냐하면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서랍에저녁을 넣어두었다/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사랑하라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제 시간에 온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생각했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

시와 감상 2024.10.14

맥락 [남길순]

맥락 [남길순]    삼촌의 소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삼촌은 입을 가리고 웃는 버릇이 있다이가 검게 썩어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병나발을 오래 불다보면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분간이 잘 안 되는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삼촌이라는 세계삼촌이 쓴 소설을 읽는다나도 놀라고엄마도 놀라고가장 놀란 건 소설 속의 삼촌이다삼촌은 죽은 스티브를 또 한번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택시를 탄 삼촌은호속작을 써야 한다고 조용한 곳으로데려다달라고 한다목적지를 잃어버린 삼촌강을 따라 내려가며 택시 기사가 갸웃거린다날개가 자꾸 자라나는키가 마구 자라는삼촌은 늙지 않는다삼촌은 죽지 않는다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일 때빛이나는삼촌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 한밤의 드램펄린, 창비, 2024        ..

시와 감상 2024.10.11

웨이터의 나라 [남길순]

웨이터의 나라 [남길순]      이곳의 법칙은 받아적지 않는다는 것   웰던으로 익힌 티본스테이크 칠면조날개튀김 카르파초기름을 적당히 두른 청경채 카베르네소비뇽  웨이터는 머리가 둘 셋 넷으로 늘어난다  눈동자가 유독 빛난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새우와 연어와 후추와 바다와 골목 향과 바질과 식초와올리브   이 많은 주문을 어떻게 외우는지  그는 노련하지만  먹어보지 않아 맛을 모른다는 것   접시와 접시를 손가락 사이에 펼치고   웨이터가 온다   그릇과 그릇이 부딪고 스푼과 포크, 나이프와 나이프   정중하게  공손하게   테이블이 돌아가고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 이 모든  기억은 와르르   여기서는 잊어버리는 게 생존의 기술이라는 것   조용히 꽁초를 밟아 끄듯  테이블을 엎고  새로운 판을..

시와 감상 2024.10.05

장마 [하재일]

노명희 화가 그림, 낮달-아직여름    장마 [하재일]    가끔 는개 보슬비 가랑비그리고 한나절 장대비천둥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듯한데비구름에 가려 알 수가 없다 산 바깥 마을 어귀엔모감주나무 꽃이 피고비단벌레가 이슬을 입어 빛나고순간 번갯불이 번쩍거린다 꽃이 귀한 여름철이라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고나무 아래 오래 머물게 하더니,투명한 비닐우산 위로꽃잎이 빗방울을 안고 떨어진다 저 숲속으로 연인 둘이서손잡고 걸어 들어가더니앞이 캄캄한지, 아무 소식이 없다                  - 모과는 달다, 달아실, 2024      * 꽃이 귀한 여름철이라......과연 그럴까? 일단 개망초가 흐드러지고배롱나무 붉은 꽃, 해바라기, 장미, 백합, 나팔꽃, 루드베키아, 수국, 패랭이꽃, 코스모스, 라벤더..

시와 감상 2024.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