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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한 회사에는 텃새가 산다 [김광명]

이직한 회사에는 텃새가 산다 [김광명]    오착륙이라면 좋겠어 오늘의 도래지는 종이컵을 사랑의 날개라고 부르지유럽의 여름을 탁자 위에 늘어놓고, 풍선도 불어최대한 쓸모없게 따듯할수록 잘 녹는 기포달달함은 이때 등장하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부리로 농담을 저어버리지 눈이 마주칠 땐 어떤 얼굴이 어울릴까노르딕풍의 쓰다 남은 겨울과 털실 조끼와 통조림 산타기억 니은 기억 디귿 기억 리을 기억 다시 도돌이표자작나무의 자세로 시럽이 되지 휘청거리며 더 아래로 날아난 꿈을 잃어버린 나이부터 체인질링*이 취미였어 일어서지 못하면 팔짱 끼고 떠날 수 없지끝이 아니야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랑의 시작이지왼뺨이 부서진 철새는 잘 날 수 있을까잘 숨을 수 있을까깃털이 얼어붙은 겨울에 웃어도 될까 단맛이 부족한데 내일은 괜..

시와 감상 2024.08.05

적정 온도 [조온윤]

적정 온도 [조온윤]    주민센터에 왔어요창구에서 나를 응대해준 공무원은친절하지 않았지만무례하지도 않았습니다 대기표를 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내내그들의 첫인사와 끝인사는 엇비슷했습니다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서류를 건네고다음 번호를 부르죠 전문기구가 권장하는 겨울철 적정온도는 이십도겨울이면 이곳은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합니다 평온하다는 것, 지금 내 몸이 식어 있지도뜨겁지도 않다는 것손을 잡아도 느낄 수 없을 만큼투명한 체온이라는 것 다음 사람을 위해 내가 앉은 자리에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듯이휴대전화를 보며 걸어오는 이를 피해잠시 무해한 공기가 되어주듯이 오늘도 우리는 호의도 적의도 없이 안녕을 건넵니다 용무를 끝내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주민센터를 나왔습니다바깥은 공기가 찼지..

시와 감상 2024.07.25

시작 [박지혜]

시작 [박지혜]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햇빛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질경이가 좋겠다고 했다 투명한 유리병이 더 낫겠다고 했다 하얀 말을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그냥 노래를 부를까 노래를 부르느니 물로 들어가겠다며 발끝을 바라본다 몽환적이라는 말을 좋아하느냐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든 말에 속고 있다고 했다 차라리 일요일의 햇빛을 생각하겠다고 했다무심한 지렁이를 생각하겠다고 했다 가벼움에 대한얘기를 다시 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가볍고 빛나게떨어지고 있는 고독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텅 빈 모음만을 발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만 사는 섬에서 나오지 않았다 흐린 눈빛의 그들은 언덕을 그리거나 나무를 심거나 물고기를 불렀다 물빛을 닮은 눈빛은 항상 먼곳에 있었기 ..

시와 감상 2024.07.24

순진한 삶 [장수진]

순진한 삶 [장수진]      끝없이 내린 첫눈 속에 잠긴, 작은 짐승. 곁에는 수분이 바싹 마른 수국 한 묶음이 쓰러져 있다. 이 거리의 오래된 소설, 영화, 편지, 시는 끝났다. 너는 오늘도 사라진흑백영화 속에서 무언갈 찾는다. 익숙한 골목과 재킷, 슬로와 폭발.   끝에 파도가 쳤지.   주인공의 볼품없는 몸이 훤히 드러난 그 장면에서 너는 계급과 인종에 대해 잠시 생각했지만 결국엔 파도가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파도만 보게 되었다. 파 도 파 도미 도. 단순한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흥얼거리며 너는 파도를 이끌고 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짧은 팔, 굵은목, 뜻밖의 단정한 말들 소진된, 사람들.   비닐 장갑 위에 놓인 병든 아버지의 불알처럼 너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을 살아간다. 간판만 남은 영..

시와 감상 2024.07.20

그림 없는 미술관 [주민현]

그림 없는 미술관 [주민현]    아직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미술관을 거닐며당신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지구 저편에 있는 그림 없는 미술관에 대한이야기에 금세 빠져들었어요 미술관에 그림이 없다면무엇이 전시될까요 지구에서 동물이 사라진다면작고 약한 것부터 무릎 꿇리게 될까요 밖에 불이 났나봐요소방차가 왔으나 아직은 하늘이 거무스름하고 나는 창 안에서 개를 안고 있어요개는 따뜻하고인간을 맹목적으로 믿는 듯이 맹목적인 따뜻함 개를 사랑하지만 양을 먹어요소를 입고요 말은 탑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타오르던 연기가 걷히고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가볍게 눈 내린 아침에인공눈물, 인공항문, 인공지능, 그 모든 인공에 대해 생각하다가 가볍게 내린 것들은 가짜 같군요 역 안에는 구찌, 샤넬, 루이비통 없는 ..

시와 감상 2024.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