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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 미래 [여세실]

이제와 미래 [여세실]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였다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잡아두는 것에는 재능이 없고 외우던 단어를 자꾸만 잊어버렸다   잎이 붉게 타들어간 올리브나무는 방을 정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여전히 축축한, 죽어가면서도 사람을 살리고 있는 나무를 나는 이제라고 불러본다흙을 털어낸다 뿌리가 썩지 않았다면 다시 자랄 수 있을 거라고   이제야 햇볕이 든다  생생해지며 미래가 되어가는   우리는 타고나길 농담과 습기를 싫어하고 그 사실을 잊어보려 하지만  이미 건넜다 온 적 있지 뿌리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날아본 적   양지를 찾아다녔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종 하나를 화분에 옮겨..

시와 감상 2024.08.31

죽은 시인을 위한 낭독회 [채인숙]

최삼용 시인의 시집 출간 기념, 시하늘 시낭송회에 초대된 플로우님, 초록여신님 그리고 주페가 시낭송을 했었다.    죽은 시인을 위한 낭독회 [채인숙]    죽은 자와 산 자가한 지붕 아래 동거하는 섬에서우리는 만났습니다 당신은오래 쓴 시를 숨어서읽고 있었습니다 혼자 쓰고혼자 지우는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은늘 등이 굳어 있고매사 다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쓰다가 멈춘 문장을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검은 모래 해변을 함께 걸으며저녁이 오면 세상의 온갖 색을 거두어 들이는빛의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죽고 싶냐는 질문을 한 적은 없지만시인은 죽어가는 얼굴을 붉게 감추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시는 희망이 있는 걸까요 주목나무 아래 앉아우리가 함께 읽지 못한 시를 혼자 낭독합니다 우리의 ..

시와 감상 2024.08.29

모조 꽃 [임지은]

모조 꽃 [임지은]      화요일마다 동네에 꽃 트럭이 왔다 사람들이 꽃을 한다발씩 사 갔다 "꽃을 소분해 놓으면 집 안 어디서나 꽃을볼 수 있잖아요" 나는 꽃이 보고 싶으면 꽃을 사지 않고꽃을 검색했는데   선물 받은 꽃이 일주일이 지나도 시들지 않았다 잎사귀를 문질러 봐도 생화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시들지 않아모조품인 걸 알았다 "시들지 않으면 언제든 꽃을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더는 보지 않게 되었다   동네엔 화요일마다 꽃 트럭이 왔고 나는 꽃이 보고 싶으면 검색창에 꽃을 입력했다                 -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민음사, 2024     * 일천구백칠십년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다.어머니는 모조꽃을 조립(?)하는 아르바이트를 하셨다.집에서 플라스틱 ..

시와 감상 2024.08.24

여름 달 [강신애]

여름 달 [강신애]    까페에서 나오니끓는 도시였다 긴 햇살 타오르던 능소화는반쯤 목이 잘렸다어디서 이글거리는 삼복염천을 넘을까 보름달요제프 보이스의 레몬빛이다 내 안의 늘어진 필라멘트 일으켜저 달에 소켓을 꽂으면파르르 환한 피가 흐르겠지배터리 교체할 일 없겠지 달님이 이르시기를 차갑게 저장된 빛줄기들을 두르고 붉은 땅무풍의 슬픔을 견디어라우주의 얼음 조각들이 예서 녹아 흐를 테니                      -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문학동네, 2020       * 이천년에 이란에 출장 간일이 있다.일주일을 테헤란에서 반달아바스까지 칠백킬로를 달렸고다시 그 길을 돌아왔다.반달아바스는 남쪽 항구라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이다.실외온도가 오십도.바깥을 돌아다녀도 그렇게 더운 줄 몰랐다...

시와 감상 2024.08.22

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 [임지은]

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 [임지은]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얘기가 있다 궁금해서 걸어 보았다 덕수궁에 왔다가 입장료 있으니 들어가지는 말자는 사람과실은 가고 싶은 곳이 창덕궁이었다고 하는 사람과그걸 왜 인제 와서 말하냐는 사람 길게 이어진 돌담길을 걸었다 여긴 정말 걷기 좋고 돌들도 이렇게 예쁜데오래된 성당 건물도 보이고자판에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파는데 헤어지기 좋아서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사실 덕수궁인지 창덕궁인지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네가 더 이상 좋은 사람이 아니고 모자의 시원함과 팔짱의 따뜻함을좋아하던 우리가 더는 걷고 싶은 계절이 없고 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 돌담길을 걸었다 하나로 시작해 둘로 끝나는 이야기도 좋지만둘로 시작해서 하나로 ..

시와 감상 202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