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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나무 [신미균]

사시나무 [신미균] 바람도 불지 않는데나무가 잎사귀를부르르 떠는 것은 그동안 들었던새들의 소리를털어 내는 것이다 틈만 나면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며죽겠다 못 살겠다 싫다하소연하는 것들을 묵묵히 들어 주고감싸 주다 보면나무도 어느 날은진저리를 치고 싶을 것이다 시누이 많은 집맏며느리처럼 - 빈티지풍의 달, 파란, 2026 * 사람들은 많은 친구로부터, 혹은 가족으로부터 못살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내 코가 석자인데도 일일이 못살겠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준다.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나를 생각하게 된다.니가 못살겠다 하지만 나도 못살것 같은데 그럼에도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그래, 맞아! 동조해준다.그냥 하소연하는 것만으로도 들어주는 이가 있으니 속이 후련한 것일까.사..

시와 감상 2026.04.04

카즈베기에는 저녁이 오고 [나희덕]

카즈베기에는 저녁이 오고 [나희덕] 눈 덮인 카즈베기 산정,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곳 위대한 도둑질의 대가로 바위에 묶인 채날마다 되살아나는 간을 독수리에게 쪼아 먹히던 곳 이제 제우스도 프로메테우스도 독수리도 보이지도 않는다 바위만 남아 조금씩 자라났다프로메테우스의 간처럼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바위를 쪼다 날아갈 뿐 카즈베기에는 저녁이 오고회양목 안에 숨겨진 불이 하나둘 켜지고 오래전 판도라의 상자에서 흘러나왔던질병과 고통, 불행과 가난, 전쟁과 폭력이계곡 아래 퍼져가고 신들은 사라지지 않았다잊힘으로써 버려진 것이다 버려진 신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성스런 한밤에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나아가는바쿠스의 성스러운 사제*처럼 기다려 보지만이따금 차오르는 빛의 기운을 느끼기도 하지만 신들은 끝..

시와 감상 2026.03.25

물의 경전 [이대흠]

물의 경전 [이대흠]탐진 시편2​ ​ 보아라더 자세히 들여다보아라꽃이었다가 잎이었다가녹슨 칼처럼 굳은 혀였다가흙이 되는 말씀을​언제 어느 때고 세월은 도둑처럼 다녀가고물의 말씀을 화석으로 남기려다가끝내는 물이 되어 흘러가는 무모한 사람들​마저도​물의 경전에서는 살아 있나니​보아라서러운 것바라는 것생의 환희 같은 것이다만 여백으로 기록되는 물의 경전을 보아라​바서지면 촤르르 방울 소리 같고튀어오르면 동글 별 싸라기 같고싹의 숨결 같은 말씀들이 또랑또랑 모여서지금 흘러가고 있지 않느냐​외로운 자들이 흘려보낸 귀가물낯에 노을 비늘로 듣는다떠났던 소년들의 종아리가여기 돋아나온다​가장 미워했던 얼굴이연둣물 들어 햇잎으로 오고가장 사랑했던 사람이눈동자를 잃고 흐리로 괸다​사랑했던가?행복했던가?물으며 묻지 않으며다시..

시와 감상 2026.03.13

공원의 왕 [문성해]

공원의 왕 [문성해] 한 사람이 공원 벤치 위에 앉아 있다는 건그에게도 귀속할 세계가 생겼다는 거 그의 발치 아래 모여드는 비둘기들이 있다는 거그의 정수리 위로 뾰족한 주둥이를 들이대는 별과그의 그림자로 섞이는 그늘이 생겼다는 거 이 소읍한 사람이 오래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는 건호수 위로 고개를 쳐드는 자라와비늘 뜯겨진 물고기들과엷은 빛깔의 옷감을 준비하는 수련들이누군가의 홍채 안에 수런거리며들어선다는 거 한 사람이 공원 벤치 위에 길고 지루하게 앉아 있다는 건그의 사정거리가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고 있다는 거아무도 찾지 않는 이 쓸쓸하고 오래된 공원에서오직 한 사람의 관객인 그를 위해조연이 되어 주는 것들이 있다는 거, 총칼이 아니라도 매일매일 넓어지는 영토가 있다는 것한 사람이 공원 벤치 위에..

시와 감상 2026.02.16

너에게 [이상국]

너에게 [이상국] 나는 패배도 없이 살았다그렇지만 너를 잊은 적이 없다나무 속의 이파리처럼, 일생의 실연처럼너는 내 안의 무엇이었다 너는 때로 구름처럼 다정했으나나무들이 침묵하고 비가 지나가는 동안사랑은 어떻게 왔다 갔으며저녁이 오고 밤이 가는 데까지너 때문에 얼마나 오래 걸었던지 산다는 건 누구나 제게서 멀어져 가는 일자고 나면 새들은 무슨 소식을 전해 오는지비애는 어떻게 강을 건너왔으며바람이 무엇을 쓰고 가는지너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너 없이도 살 수 있지 않았을까,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었지만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생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네게 내 인생의 대부분을 쓰고도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 -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 창비, 2025 *..

시와 감상 2026.01.31

한 여자네 집 [이상국]

한 여자네 집 [이상국] 어느 날 한 여자 속으로 들어가일생을 나오지 못했네 복사꽃 피는 시절에 만나낙목한천에도 떠나지 못했네 아침에 집을 나서 저녁에 돌아오는데음식과 노래는 나그네를 머물게 하네* 모든 여자는 숲이나 강처럼거두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지만나는 컴컴한 그곳에 쥔을 든지 오래, 때로는 검은 비가 강을 건너오는 저녁마구간에 건초를 넣어주고여자와 트로트를 듣기도 하네 어느 날 여자 속으로살아서 들어갔다가죽어서도 못 나오네 나는 여자에게서 왔으므로 여자가 고향이네 * 노자 『도덕경』 제35장 -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 창비, 2025 *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모든 인류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건만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니이런 허술..

시와 감상 2026.01.19

심해어 [장석주]

심해어 [장석주] 세상은 어지러웠다.어제의 친구가 적으로 표변하여 벼린 칼을 겨누고베는 세태가 무서웠다.세상을 등지는 게 살길로 보였다. 눈 감고 귀 막은 채숨어 살지만누군가에게는 빛으로 발광(發光)한다.어둠 속에서 몸을 환하게 밝히는저 은둔 군자들! - 몽해항로, 민음사, 2010 *플로우님이 올리신 물메기 시가 생각나고물메기가 심해어에 속한다는 생각이 나고아주아주 오래전에 남해에서 플로우님과 아침식사로 물메기탕을 먹은 게 생각납니다.부드럽고 하얀, 맑은 탕으로 기억합니다.저 은둔군자를 맛있게 먹었던 것입니다.^^*

시와 감상 2026.01.11

피자피자 [이유나]

피자피자 [이유나] 그 많은 상처를 누가 다 먹어 치웠나나는 늘어질 대로 늘어지는 생각을손가락 끝에 올려 돌리다가찢어지거나 터지면 다시 뭉개기를 반복하지찢어지고 터져야 꽃이 핀다던당신의 속내를 끝내 모르고잘 부푼 생각을 펼친다, 얇고 넓게펼쳐놓은 생각을 정해진 틀의 크기로 자르면동그랗게 잘린 생각을 기다리는 건 찌르기바닥을 친 생각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내듯찌르는 순간엔 감정이 섞이면 안 돼감정 없이 피를 연기하는 토마토소스온몸에 펴 발라 진동하는 음모엔동원되는 공범들이 있지새우가 세우는 계략을 배후로페퍼로니 올리브 포테이토 치즈는 듬뿍조커를 능가하는 치즈에 애정을 담아달궈진 불가마 속으로 밀어 넣지뜨거운 건 순간이야, 상처는 쭈욱 늘어나겠지터진 수포처럼 활화산이 된 상처 위에파슬리는 독이 될까 약이..

시와 감상 2026.01.04

베고니아 [박제영]

베고니아 [박제영]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만 개의 이름과 만 개의 얼굴을 지녔지만한 개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꽃 말하자면 당신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 멀어지는 나 잡아봐라 나 잡아봐라썰물과 밀물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술래잡기 당신이라는 꽃 만 개의 색을 가진 무지개였나만 개의 꼬리를 지닌 여우였나고장 난 시계에 갇힌 뻐꾸기였나 말하자면 텅 빈 우리텅 빈 우리라는 모순 - 아흔아홉 개의 달과 아흔아홉번의 겨울, 달아실, 2025 * 박제영시인은 공과대학 기계과를 나왔는데 시를 쓰고 식물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가진 분이다.꽃에 관한 책까지 낼 정도면 거의 식물에 관한 박사급이 아니던가.시에도 종종 등장하는 꽃들이 어떻게 시인의 마음에 들어 시집에 등장하게..

시와 감상 2025.12.26

12월의 귀 [심재휘]

12월의 귀 [심재휘] 귀를 베고 잤더니 귀가 아팠다12월의 소식도 아팠다오른쪽 귀를 베고 자면 당신이 아팠고왼쪽 귀를 베고 자면 새벽달이 아팠다 담요처럼 얇게 펴지는 어둠을추운 마음에 덮을 수는 없어서모로 누우면 뒤척거리는 밤이 되었다펴진 귀는 편해진 귀가 되어도당신의 모습은 아픈 귀에만 모였다 밤을 온몸에 묻히고 죽은듯이 있어도 12월은 간다해가 바뀐다 해도 빈 자리는 여전히 먼 곳이고귀는 아픈 방향을 달고 있도록 태어나제자리로 오래 가야 할 하현은 조금 더 해쓱해졌다 - 두부와 달걀과 보이저, 문학동네, 2025 * 생전 귀가 아픈 적은 없었다.일주일전부터 왼쪽 귀가 비정상적으로 들리는데 찌글짜글 잡스러운 소리들이 들렸다.병원에 가서는 앵앵소리라고 말했고병원은..

시와 감상 2025.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