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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공간 [안희연]

백색공간  [안희연]    이누이트라고 적혀 있다 나는 종이의심장을 어루만지는 것처럼그것을 바라본다 그곳엔 흰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설원을 달리는 내가 있다 미끄러지면서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글자의 내부로 들어간다 흰 개를 삼키는 흰 개를 따라다시 흰 개가 소리 없이 끌려가듯이 누군가 가위를 들고 나의 귀를 오리고 있다흰 개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긴 정적이단 한 방울의 물이 되어 떨어지는이마 나는 이곳이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았다 종이를 찢어도 두 발은 끝나지 않는다흰 개의 시간 속에 묶여 있다                 -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8         * 썼던 글이 '삭제' 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삭제될 때가 있다.머릿속이 하얘진다.다시 그글을 떠올리며 써보지만 원래의 글과는 ..

시와 감상 11:32:56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신용목]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신용목]   열아홉의 내가  자신의 미래를 보고 싶어서  삼십 년을 살았다  내 미래는 이런 거였구나, 이제 다 보았는데  돌아가서  알려주고 싶은데, 여전히 계속되는 시속 한 시간의 시간 여행을 이제 멈추고  돌아가서  알려주면, 열아홉의 나  자신 앞에 놓인 삼십 년의 시간을 살아보겠다 말할까아니면  살지 않겠다 말할까  까만 먹지 숙제에 영어 단어 대신 써 내리던 이름과 아무렇게나 쓰러뜨린 자전거  바큇살처럼 부서지는 강물을 내려다 보며, 물은 흐르는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끝없이 뛰어내리는 거라고  생각하던 긴긴밤으로부터  나는 겨우 하루를 살았는데, 생각 속에서 삼십 년이 지나가고  넌 그대로구나  꿈에서는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지낸 삼 년을..

시와 감상 2024.09.16

복희 [남길순]

복희 [남길순]      복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   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닿고 있다   호숫가를 한바퀴 도는 동안  내 걸음이 빠른 건지 그들과 만나는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는데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  희미한 달이 떠 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                  - 한밤의 트램펄린, 창비, 2024        * 매운 음식을 많이 먹어서일까?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졌다.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는데 하루종일 쉬지않고 시끄럽다...

시와 감상 2024.09.13

달과 돌 [이성미]

달과 돌 [이성미]    돌이 식는다밤의 숲 속을 헤매다 주운창틀 위에 올려놓은 돌이 식는다어두운 방에서 빛나던 돌가만히 보면 내 눈썹까지 환해지던 그 둥근 빛 아래서나의 어둠을 용서했고침묵은 말랑말랑한 공을 굴렸다 들고양이가 베고 잤을까고양이의 꿈을 비누방울로 떠오르게 하던돌이 식는다 자줏빛 비가 내리고벼락의 도끼날이숲의 나무들을 베어버리는 동안돌 위에 얹고 있는내 손이 식는다 반달의나머지 검은 반쪽이궁금해졌다                -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문학과지성사, 2005         * 꿈도 사랑도 우정도 식어간다?돌이 가지고 있는 온기는 내가 유지해주지 않으면 반드시 싸늘하게 식을 게다.마음의 온기조차 식어간다면 돌뿐만 아니라 꿈도 사랑도 우정도 식어갈 게 자명하다.포물선을 그리는..

시와 감상 2024.09.08

시 속의 시인, '서정주'

모래로부터 먼지로부터 [장석원]   천원 한 장을 구걸하는 남자 떠오른 돌멩이 같은 비둘기들 처음 와본 것 같다 어떤 명령에 의해 걸음을 멈추었을까 뒤를 돌아본다 움푹 패어 있다 한 움큼 뽑혀나간 듯하다 광장은 쪼개지는 곳 바람이 그러하듯 광장은 중심을 지나지 않는다 바람과 햇빛, 습도와 명암까지 똑같다 지루하고 무한한 한 번의 삶이었지만 걸인이기도 하고 한 그루 나무이기도 하고 첨탑에 걸린 구름이기도 하지만 지워진 얼굴로 여기까지 걸어왔지만 횡단하는 비둘기로 가득 찬 하늘 밑에서 잠을 생각한다, 사랑의 복습을 꿈꾼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또한 아무것이기도 했다 서울역 광장의 남측면에 자리잡은 매점 앞 여섯시의 저무는 태양 아래 나는 가만히 서 있다 라디오에서 시보가 흘러나온다 라디오는 모든 것..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시 속의 시인, '천상병'

천상병 씨의 시계 [김규동]어려운 부탁 한 번 한 뒤면주먹만큼 큼직한 동작으로저고리 소매를 걷어올리고시계를 봤다칠이 벗겨진천상병 씨의 시계에남도 저녁노을이 비꼈다시계 없이도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노라고얼어드는 언어의 층계를 오르내리는 내게천상병 씨의 낡아빠진 시계는어째서 자꾸뭉클한 감정만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일까.                 -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년    인사동 사람들 [오탁번]    인사동에 가면이 사람 저 사람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중앙일보 손기상 선배도 가끔 만났다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는투고할 때의 제목은 「겨울 아침행」이었는데문화부 젊은 기자였던그가 바꾼 것이었다아아, 반세기가 다 돼가는구나시인, 교수하면서 내가 나를..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시 속의 시인, '김소월'

천변에서 [신해욱]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김소월, 「개여울」  이쪽을 매정히 등지고검은 머리가 천변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산발입니다 죽은 생각을 물에 개어경단을 빚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그랗고작고가자 없는 것들 차갑고말랑말랑하고당돌한 것..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시 속의 시인, '박용래'

섬망* [육근상]      난닝구 바람으로 쉬고 계시는 김수영 선생님 찾아뵙고 닭모이라도 한 주먹 집어주고 와야 하고, 막걸리 한 사발로 연명하시는 천상병 선생님 업고 동학사 벚꽃 놀이도 다녀와야 하고, 새벽부터 울고 계시는 박용래 선생님 달래어 강경장 젓맛도 보러가야 하고, 대흥동 두루치기 골목 건축 설계사무소 내신 이상 선생님 개업식도 가봐야 하고, 빽바지에 마도로스파이프 물고 항구 서성이는 박인환 선생님이랑 홍도에도 가봐야 하고, 울음 터뜨린 어린애 삼킨 용당포 수심 재러 들어갔다 아직 나오지 않는 김종삼 선생님 신발도 갔다 드려야 하고, 내 사랑 자야 손 잡고 마가리로 들어가 응앙응앙 소식 없는 백석 선생님께 영어사전도 사다드려야 하고, 선운사 앞 선술집 주모가 부르는 육자배기 가락에 침 흘리고 ..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시 속의 시인, '정지용'

시 읽어주는 시인 [이선영]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김소월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 질 것이다 시인아, 이상화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윤동주 오, 삼림은 나의 영혼의 스위트홈, 임화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정지용 늬는 산새처럼 날어갔구나!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기형도 진눈깨비 아, 김민부, 육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육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시대와 세기를 넘나들며 시, 정현종, 부질없는 시를 읽어주고 겨우겨우 일하면서 사는, 원재훈 처연..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시 속의 시인, '오탁번'

오, 마이 캡틴! 오, 마이 탁번 [박제영]1. 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는다​시가 뭐냐고 물을 때면 선생을 불러댔다오탁번의 시를 봐라설명이 필요 없다얼마나 재밌노?시는 이런 맛이다웃다가 배꼽잡고 웃다보면슬그머니 마음 한 켠이 짠~해지는 것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그게 시다​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어댔다2. 탁본, 오탁번오탁번 선생님 뵈러 장인수 시인과애련리 원서문학관 갔던 건데성과 속을 오가며시와 문학과 우리말의 정수를 회 뜨시는선생의 강의를 들으며우리는 시종 울다 웃다 취했던 건데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투비 오어 낫 투비”를“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요렇게 해석하는 놈들은 죄다 가짜여웃기고 자빠질 일이지“기여? 아녀? 좆도 모르겠네.”요게 진짜여이 대목에서는 그만배꼽을 잡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는..

詩人을 찾아서 2024.09.07